너도 네 새끼는 귀하쟈?!
하루 사는 것이 10년인 듯싶다. 일본의 후꾸시마 원전 사고가 내 피를 말린다. 아들이 일본에 있기 때문이다. TV에서는 연일 끊이지 않고 일본의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원전사고를 보도한다. 너무나 무시무시한 보도만 한다. 송구스러워서 조심스러우나 쓰나미는 이미 당한 일이니 그렇다 치자. 문제는 여진과 원전사고다. 어떤 해결책도 나오지 않고 급기야 행운을 비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는 소리가 나온다. 이를 어쩐다. 내 기도가 부족한 걸까. 한 편으로는 230명의 우리 국민이 소재가 파악 되지 않고 있다 하니, 내 걱정은 그나마 사치라 할까.
9.0의 강진이 나고 쓰나미가 덮치고 급기야 원전사고가 난지 사흘 만에 내 며느리와 손자가 어렵게 비행기 표를 구해서 입국을 했다. 아들은 회사에 맡은 일이 커서 자리를 쉽게 뜰 수가 없다고. 도쿄까지도 방사능이 검출이 된다고 하는데, 내 아들 녀석은 요지부동이다. 맡은 임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늘 장하게 여기던 남다른 책임감도 이럴 땐 칭찬하고 싶지가 않다. 어미의 마음을 이리도 모른단 말인가.
카메라를 하루 종일 열어놓고 영상통화를 하며 입국을 종용하지만 허사다. 큰아들을 사조해서 입국을 유도해 보지만 것도 헛일이다. 막내 딸아이에게도 청을 넣어 들어와야 한다는 어미의 애원을 전했으나 녀석은 요지부동이다. 도쿄에서는 국민들이 모두 정상생활을 하고 있고 조금의 변화도 없는데, 유독 한국에서만 떠들어댄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과잉반응이라는 게다.
그래. 우리나라는 일본의 일이라면 유독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다른 나라에서는 왜 본국의 재일 국민들을 본국으로 실어 나르느냐는 말이지. 그도 과잉반응이란다. 적어도 제가 있는 도쿄는 무사하다는 것이다. 일본의 언론은 차분하고 냉담한가 보다. 일본은 자국민의 동요를 걱정해서 문제를 축소 은폐한다고 역설을 해 본다. 그래도 녀석은 그 곳에 있어야 할 이유를 들어 입국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너도 네 새끼는 중하고 귀해서 한국으로 급하게 보냈지 않니. 그럼 엄마 마음도 읽을 줄 알아야지!”하며 내 마음이 어떠하겠느냐고 되묻는다.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 엄마가 ‘그러면 아기와 에미만이라도 보내라’하셨잖아요.”한다. 나쁜 너~~~~~~엄. 나쁜 너~~~~~~~엄. 에미 속이 까맣게 타는 줄도 모르고. 아니, 모르는 척하는구먼.
나는 성대를 수술하고 쉬는 중에 일본의 강진과 쓰나미와 원전사고를 접했다. 아직은 몸도 마음도 무리하지 말라는데 몸도 마음도 온통 일본으로 향한다. 시시각각 아니,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악재에 내 신경은 널뛰기를 한다. 차라리 내가 일본으로 건너갈까 보다. 첨벙첨벙 현애탄을 건너 넓은 집을 쓰는 제 큰누나의 집에서 며느리와 손자는 지내고 있다.
아~, 냉각펌프 두 대가 가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전력이 복구 됐다는 게다. 내 가슴이 더워진다. 눈물이 솟는다. 나는 지금 펑펑 울고 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신 게다. 암. 하나님은 늘 날 사랑하시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주시지 않는가. 가슴이 답답해진다. 수술 받은 성대가 부어오르는 느낌이다. 누굴까. 시방 원전사고를 위해서 작업 중인 이들은 누구일꼬. 그들은 누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일까. 나도 내 아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자. 얼마나 크고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가 말이지. 자존심을 내세워서 미국의 도움을 거절해서 일을 키웠다는 미움도 버리자. 살아남은 일본 채류 중인 각국의 사람들, 그 모두를 위해서 기도 하자. 그 안에 내 아들도 있으니까.
<할미의 까만 속도 어미의 걱정도 모른 체 손자는 어미 품에서 곤히 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