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된 시어미와 멋진 사위
아들이 설거지를 한다. 어쩐 설거지거리가 저리도 많누. 그릇은 쓰고 나서 그때그때 씻어 엎으면 설거지가 쉬울 것을……. 팔을 둥둥 걷어붙이고 설거지를 하던 아들이 돌아선다.
“엄마.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일이니까 좀 봐 주세요.”
“누가 뭐래?!”
아마 입이 뾰족하게 모아졌는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아기는 어미의 손에서 키워져야 최선이란다. 아기가 어미의 손에서 키워지는 데에는 아무런 이유로도 딴지를 걸 수가 없는 일이라 한다. 무조건 어미의 손에서…….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그래서 저는 제 댁의 설거지를 대신하고 그녀를 제 딸아이에게 내어주는 것이라 한다. 암. 암. 옳거니! 옳은 진리로고. 천지가 개벽을 한다 해도 변치 않을 이치다.
그러게 나도 그걸 모르는 바 아니다. 젊은 시절 이미 그 이치를 터득한 지라 내 스스로 변두리인생을 자처하지 않았던가. 아이들을 뗘놓고는 도저히 일터로 나갈 수가 없었지. 하여 양장점을 집에서 가능한 한 가까이에 두고 아이들을 돌보았다. 아이들도 어미가 보고 싶을 땐 수시로 내 일터를 드나들도록 했었고. 언제나 내 일보다는 아이들이 우선이었지.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목마른 어미였나 보다. 그런데 이 어미는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았으니……. 모자라도 한참은 모자라는 어미로고. 허나 내가 처한 상황에서는 언제나 최선을 다 했기 때문에, 내 아이들이 전업주부를 어미로 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는 사실을 깡그리 모르고 있었던 게다. 그러니까 어느 자식이, ‘이 어미보다 더 잘해주는 다른 친구들의 어미’를 운운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내가 ‘최고의 어미’였다고 지금도 자만하고 있을 게다.
그래서 내 아들은 제 딸아이에게 그 아이가 원하는 만큼 제 댁을 기꺼이 양보해 줄 수 있는 것이렸다. 그렇다면 할 말은 없다. 제가 부족하게 느꼈던 부분을 딸아이에게 채워주겠다는 데에야……. 그러면 내가 저들을 위해서 더 잘 뻗어나갈 수 있었던 내 젊음을 깡그리 접고 희생을 했던 내 청춘은 뭐람. 허긴. 네 남매를 키우며 힘들었던 적(跡)을 그들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서럽고 부족했던 일만 기억하는지 낳아줘서 고맙다느니 잘 키워줘서 고맙다는 소리는 일언반구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이들이 결코 못됐거나 빗나간 아이들이 아닌 데에야 사실이 그런가 보다. 다만 이웃에서 내 삶을 들여다보아 왔던 이들이 오히려 ‘참 열심히 살았다.’고, ‘고생 많이 했다.’고 격려를 하니 위안이 좀 되기는 한다.
“어머니. 제가 오빠 설거지 시킨 거 아니예요.”
깜짝 놀라 돌아보니 며느리가 뒤에 아기를 안고 섰다. 내 젊음의 골짜기를 더듬는 동안 그녀는 나를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다.
“누가 뭐래!”
“아니. 어머님이 그러구 계셔서...”
내 며느리의 시어미는 생긴 대로 참 못 됬다. 아니 생김보다 한참은 더 못 됬다.
“그러~엄. 알지. 지가 하고 싶어 하는 거 알고말고.”했으면 좀 좋아. 나도 며느리가 내 아들에게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지 않는가. 주판을 튕기지 않아도 며느리가 내 손녀 딸아이들 안고 있는 모양새가, 보기에도 얼마나 좋은가 말씀이야.
서재(책장이 있고 책상이 있는 작은 방이지만 이왕이면 멋지게 그렇게 부르자. 돈 드는 일도 아니니 ㅋㅋㅋ)에서 아들이 청소기를 들고 나온다. 안방을 휘돌아 거실, 제 방이며 주방까지를 돌아친다. 이제 걸레를 들고 한바탕 설칠 태세다. 일어나야겠다.
‘제기랄~. 지기랄~!’
왜?! 만석아~. 만석아~.
그 아들의 장모님이 보았으면, ‘니 아들은 멋진 사위’라고 치켜세울 겨~.
아~ㅁ. 내 아들로도 멋저부러~ ㅎㅎㅎ.
(아빠는 시방 설거지 중이고 엄마는 내게 간식을 먹이는 중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