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年上)의 손아래 시누이
공연한 걱정을 하지 않았는가. 저리도 잘 맞는 것을. 독립해서 사는 딸아이를 며느님 둔 시어미가 집으로 불러들이려고 마음먹었을 때 하던 걱정 말이다. 것도 딸년이 며느님보다 4살이나 연상인 데에야 결코 공연한 걱정일 수는 없었지. 제 오라비가 늦은 장가를 드는 덕에 연하(年下)의 올케를 맞게 된 딸년도 마땅치 않긴 마찬가지였겠지. 아니지. 오라비만 범인으로 잡을 필요는 없지. 저도 34살이 적어서? 먼저라도 가라는 오라비의 등만 끈질기게 떠밀더니만……. 남의 집 다른 딸의 이야기라면,
“거 보라지. 꼴좋다.”하겠지만, 내 딸년 이야기이고 보니 그리 말도 쉽게 나오지 않네.
글쎄다. 며느님은 결혼하기 전에 내 아들에게 여동생에 대해서 사전에 얻어 듣기는 했겠다. 아마도 ‘쉽지 않은 시누이’ 라고 했는지, 연상이라 그런지 적지 않게 어려워했다. 그러나 막상 마주치고 보니, 짝짝꿍이 그리도 잘 맞을 수가 없다는 말씀이야. 내 딸년의 영악스러움을 자랑하기는 그렇고, 며느님의 깍듯한 시누이 대접이 융성하니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지가 별 수 있어?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곱다.’했던가? 그건 각자가 이미 먹을 만큼 먹은 나이이니 나름 터득할 터이고. 나는 그저, ‘서로에게 말로 주고 되로 받으라.’는 말을 일렀다. 받기를 바라지 말고 ‘퍼주라’는 내 방식의 교통정리였다고나 할까?
딸년으로서는 ‘아가씨’라는 말이 듣기에는 호강스럽기도 하겠다. 그러나 어린 나이의 오라범댁에게, ‘언니’라고 부르기는 쉽지 않았을 게다. 그리 해야 한다고 이르지도 않았는데 혀가 그리 잘 돌아가더냐고 물으니, 당연하지 않느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그렇긴 하지. 당연한 일이지. 가끔은 내가,
“네 언니가 말이다.”하면, 제 친언니와 혼돈(混沌)이 인다고,
“엄마가 나한테 말할 때는, ‘올케’라고 해 주세요.”라고 짚어준다. 것도 맞는 말일세.
며느님은 아직 그 알량한 ‘아가씨’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없다. 아, 내 아들에겐 할 말이 있었을까? 그랬는지 저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시누이가 설거지 한 번 하는 것도 용납을 하지 않는다. 때로는 할 수도 있는 일이라 일렀으나, 큰일이나 날 것 같은지 이미 팔꿈치까지 올라간 고무장갑까지도 벗기고 만다. 혹자는 이 상황이 시어미로서는 흐뭇하다 하겠으나, 결코 아니다. 배부른 며느님을 돕겠다는 시누이의 의도를 별스럽게 마다하는 것도 마땅치 않기는 일반이다.
둘은 젊은 아이들 말대로 코드가 잘 맞는다고 해야겠다. 요즘의 베스트셀러에 대한 평이며, 광고로 도배가 되는 화장품 이야기며, 이슈가 되는 영화에 대한 시선 등등…….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 하다가 이견(異見)이 생기면, 둘이 앞 다투어 컴 앞으로 쪼르르 달려간다. 한쪽은 승자(勝者)요 한쪽은 패자(敗者)지만 거실로 나올 땐 둘 다 발그레하게 웃는 얼굴이다.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영감에게 넌지시 제안을 했다. 저리 잘 지낼 때 딸아이가 얼른 결혼을 하면 좋지 싶어서다.
“막내를 내년엔 시집을 보내야 하는데…….”
“그게 우리 맘대로 되나?”
허긴. 지금 엎어지게 열애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내년이 코앞인 데에야.
“안 돼요. 2년만 더 있다가 보내세요.”
“…….”
“…….”
영감도 나도 말을 잇지 못하고 며느님의 다음 말을 주시한다.
“아기 나으면 아가씨가 나보다 더 나은 교육을 시키실 거 같은데요.”
이런, 이런. 며느니~임! 그건 아니지. 내 딸이 들으면 제욕심만 부린다 할 걸?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