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님, 좀 말려주시게
제 시간에 약 먹는 걸 자꾸만 잊는다. 어쩌다 한 두 번이라면 용서가 되겠으나 허구한 날 이루장창 잊는다. 어려서는 정신 좋다 소리도 많이 들었는데 말이지. 아니 젊어서도 그렇긴 했지. 막내 딸아이가 결혼을 하기 전에 손전화에 알람으로 약 먹을 시간을 입력하고 떠났으나, 어떻게 손질을 했는지 하나 둘 오류가 나더니 이젠 믿을 게 못 된다.
혈액순환제는 아까 먹었나? 먹었지? 아니, 안 먹은 것도 같은데. 도통 아리송하다. 에~라 하나 먹고 보자. 하나 더 먹는 것이 하나도 안 먹는 것보다는 좋을 것 같다. 한 달 치로 처방 받은 약이 27일로 끝이 난다. 콩 주워 먹듯 먹은 모양이다. 시아버님이 어머님의 영양제까지 자시던 생각이 난다. 그래도 난 아직 시아버지의 그 연세는 아닌데 말이지.
TV에 나오는 어느 연예인이 한 번에 먹는 약이 한 주먹이라 해서 혀를 찼더니, 이젠 나도 그녀 못지않게 그 수가 늘어났다. 여기저기 아픈 곳이 늘어나니 약도 덩달아 늘기 마련이지. 챙겨먹는 일도 이젠 머리를 써야만 감당이 된다. 한꺼번에 쏟아서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으면 좋으련만 그리는 말라 한다.
줄 친 공책에 세로 칸을 만들어서 차례대로 먹고 나면 체크를 하려고 줄을 그린다. 식전에 위산 억제제를 먹고 아침 식사 뒤에 혈압약을 먹는다. 눈 영양제 종합비타민을 저녁식사 전에 시간을 쪼개어 먹는다. 저녁 식사 후에 혈압약을 다시 먹고 자기 전에 점안액을 넣으면 하루 투약은 끝이 난다. 그러고 보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 요는 먹었는가 안 먹었는가가 문제다.
벽에다 단정하게 붙여놓았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날짜까지 체크가 되어 있다. 깜짝 놀라는데 저만치에서 영감이 소리도 없이 활짝 웃고 섰다. 보림이가 할머니를 따라서 각 칸에다 모두 동그라미를 그려 넣은 것이다. 하하하. 웃을 수 밖에. 보림이도 덩달아 허리를 굽히며 웃어댄다. 제가 한 짓이 우스운 일이란 걸 아나 보다.
보림아~!
할미 좀 봐주라. 할미 골치 아파아~.
너는 웃냐? 이게 웃을 일이 아니랑께.
요번에는 그 동글뱅이 위에다 X표를 할 것이로구먼. 다음번에 와서는 또 할미 따라서 X표를 몽땅 할라능가? 할미는 그 위에 다시 빨강 색연필로 표시를 할 것이여. 그 다음엔 검은색. 그다음엔….
보림인 엄마 말 잘 듣쟈?! 어미가 좀 말려야쓰겄다. 할미는 걍 웃고 말아야지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