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제35회
선전포고(宣戰布告)
고실고실 자르르. 돌솥에서 윤이 나는 밥 한 주발을 담아 상에 올린다. 시원한 미역 냉국을 올리고, 김치도 새 것으로 썰어 얹는다. 그이의 적성대로 바싹 마른 조기도 노릇노릇 구어 뉘어놓으니 제법 성찬이다. 이만하면 되었는고? 금방 닫은 냉장고를 다시 열어 살피고는 마른 침을 꼴깍. 앞치마 벗어 걸고 밥상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영감은 아직도 책상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는 중이다. 덥긴 더웠나 보다. 샤워를 방금 끝내고 아직 런닝도 입지 않은 채이다. 에구~. 오늘 따라 영감의 옆구리에 굵은 주름이 더 깊어 보이는구먼. 그래도 마음먹은 김에 할 말은 해야지. 다시 한 번 더 마른 침을 꼴깍.
"진지 자셔요."
오늘 따라 사뿐한 어부인의 말투에, 그이가 성큼 의자에서 내려앉는다. 왜 오늘은 이리도 말을 잘 듣노. 밥상머리에 마주앉은 어부인의 고운 자태가 어여뻐 보였을까? 아니면 뭔가 할 말이 있음을 감지했을까? 그이의 눈길이 자꾸만 내 시선과 마주친다. 그러구 보니 조금은 겁을 먹은 듯도 하다. 아니지. 밥은 제대로 먹게 해야지. 사뿐히 일어나 주방으로 나간다. 커피도 듬뿍 두 스푼. 설탕도 푸짐하게 두 스푼. 아직 식사 중이니, 프림과 물은 좀 기다리자. 작은 불에 커피보트를 올리고, 찻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니 그이가 멀뚱하게 어부인을 올려다본다.
식사가 끝나고 커피를 대령하자 그이가 먼저 입을 연다.
"뭔데? 할 말 있어?"
"응. 커피 마시구."
"왜? 뭔데?"
커피 잔을 입으로 옮기며, 무척 궁금하다는 듯이 채근을 한다.
"나, 무지 힘든다."
"알어. 말 안 해도 알어."
커피 잔을 상 위에 올려놓으며 그이가 그윽한 눈빛을 보낸다.
"그래서, 이제부터 당신 밥 따로 하는 거 안 한다구요."
"……."
"그동안은 찬 밥 남으면 엄니하구 나하구 해결하구 당신 밥을 새로 했는데, 이젠 당신 하구 나하구 찬밥은 해결하구 엄니 더운 진지 해 드린다구요."
"아, 그래. 그러라구."
당연하지 않느냐고 되묻는 눈치다.
"문제는 이제부터 당신이 전기밥통 밥을 자셔야 한다는 거야."
"……."
대답이 없는 그이의 입을 주시 한다. 쉽게 그러라는 싸인이 나올 것으로 생각지는 않던 참이긴 하다.
그동안은 온 식구들의 밥을 전기밥솥에다 앉히고, 남편의 밥은 돌솥에 따로 앉혀 밥을 했다. 장장 결혼한 뒤로 41년째다. 전기밥솥의 밥이 시골에서 먹던 엄니의 가마솥 밥맛과 다르다는 게 그이의 변이었다. 같을 리야 없지. 그러나 먹지 못 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번번히 마다하는 그이와의 실갱이가 싫어서, 압력밥솥도 장만해 보고 찜통 밥도 지어 보았다. 그러나 그도 저도 모두 마다했다. 압력솥의 밥은 너무 차져서 싫고 찜통밥은 너무 걱실해서 싫다 했다. 전기밥솥을 이것저것으로 갈아도 보았지만, 한결같이 보이콧. 덕분에 시방 우리 집에는 전기밥솥만 4개가 줄을 섰다. 지어놓은 밥을 먹어주기 바라며 신경을 쓰느니, 차라리 돌솥밥을 지어서 대령하는 편이 편했다. 잘 해주다가도 오기가 나서 심통을 부리지만, 그때마다 영감은,
"나 신경 쓰지 말구 편한 대로 해 먹어."라고 하지만, 밥은 먹지 않고 퀘~엥하니 들어가는 눈을 보는 마누라 심사가 편한가 말이다. 사실로 말하자면, 국이나 찌개를 끓이는 동안이면 돌솥밥도 익혀진다. 다만 따로 밥을 앉히는 수고만 하면 되는 일이다 싶어 그리 살았다. 반찬 투정은 절대로 부리지 않으니, 그만 해도 다행이다 싶었다. 그 세월이 장장 41년.
"왜 대답이 없어요?"
엄니 대신 찬밥을 처리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역시 전기밥솥의 밥은 싫다는 무언의 항변이겠다. 밥상을 밀어 옆으로 놓고 영감 앞으로 다가앉는다.
"이젠 엄니 죽을 쒀 드려야 해요. 이번 여름 더위에 엄니가 얼마나 축이 가셨나 좀 보구려. 체중이 40kg도 안 나가십디다. 치아가 안 좋으셔서 죽을 드셔야 해요."
"……."
"이 더위에 죽 쑤고 당신 밥 따로 하고……. 마누라 잡을 일 있수? 그동안 당신 돌솥밥 대령한 거, 창피해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도 못해요. 이렇게 바쁘게 사는 마누라한테 그런 노동까지 시키는 줄 알면 당신 욕먹어요. 일하는 여자가 일하다 말고 올라와서 밥하기는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나도 채려주는 밥 먹고 싶은 나이예요. 이 나이에 일 하구 들어와서 이 더위에……. 이젠 그 짓 안 해요."
"……."
"이제 며느리 볼 날두 머지않아요. 며느리 놔두고 내가 밥 할 수는 없지요. 그렇다고 며느리 밥하는 주방에 들어가서 영감님 밥을 따로 앉히면, 젊은 아이들에게 흉이예요. '영감은 무척 위한다.'하겠지요. 그렇다고 '시아버지 밥을 따로 해라.'하는 것도 흉이지만, 어느 며느리가 시아버지 밥을 나처럼 따로 돌솥밥을 해 줄 거라구 기대해서도 안 되지요. 이젠 당신이 전기밥솥밥에 적응해야 해요. 차차 적응하시구랴."
"……."
"왜 대답이 없어?"
찢어진 어부인의 눈 꼬리에 쌍심지가 인다. 그이가 볼멘소리를 한다.
"언제는 내가 돌솥밥 하라구 해서 했어? 그냥 해."
따는 그렇다. 남편이 돌솥밥을 고집한 것은 아니다. 내가 신경 쓰기 싫어서 자청한 일이렸다.
"그냥 하라구만 하면 안 되지. 전지밥솥에 밥을 잘 먹으면서 나 신경 쓰지 않게 해야지."
아직은 그래도 나긋나긋, 나즈막한 목소리다. 오늘은 그리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이쯤이면, '그만한 일로 무슨 선전포고(宣戰布告)씩이나…….'라고 말하는 이가 있겠다. 그러나 내 영감에게 있어서의 '전기밥솥의 밥 먹어라'하는 말은 분명한 선전포고다. 그만큼 일이 쉽지가 않다는 말이다. 엄니의 황제님으로, 엄니의 해바라기로 자란 30년도 길었고, 어부인의 돌솥밥도 장장 40년이 넘었으니…. 그래도 그이는,
"노력을 하겠다."라던가,
"먹어보겠다."는 언질은 없다. 그래. 남편이 돌솥밥 해 주기를 원해서 한 일이 아니라고 치자. 문제는 엄니다. 엄니가 그 꼴, 전기밥솥의 밥이 싫어서 깨작거리는 아드님의 소행을 보고만 계시겠는가 말이다. 엄니도 따라서 부실한 진지를 드실 게 뻔하니 걱정이 아닌가.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하고 우당탕탕 밥상을 치우고는 설거지를 끝낸다. 영감에게서 얻지 못한 대답을 엄니에게서 동의를 얻을 량으로 엄니 방으로 들어선다.
"엄니요. 내는 더워서 죽겄슈. 그려서 이제는 애비 밥을 따로 안 할라요. 이제는 지긋지긋 하당께요. 이제는 우리도 며느리 얻어야 할 것인디, 어느 년이 와서 시아비 밥을 따로 해 주겄슈. 그렇다구 며느리 세워 놓구 내가 돌솥밥 하는 것두 우섭잖유?"
"이~ㅇ. 그건 그렇제."
"이제는 밥 안 먹어두 헐 수 없슈. 차차 배 고프믄 먹을 것이니께, 엄니나 신경 쓰지 말구, 진지 많이 자셔유."
"아, 금방 한 밥은 전기밥솥 밥두 괜찮은디 그려~."
역시 엄니는 현명하시다.
"이저껏 잘 해주구 와그랴~,"하시는 날엔 며늘 년 심사가 뒤틀릴 것을 아시고 하는 말씀.
"그러게 마누라 잡자는 짓이지유. 일하다 말구 들어와서 밥하기 이제는 신물이 나유. 이제는 절대루 돌솥밥은 안 혀요. 시누이들한테 물어 봐유, 그짓 하구 사는 누이가 누가 있나."
안방의 영감이 들으라고, 시원찮은 엄니의 청력을 핑계 삼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갸들도 그러더라. 그 쉽지 않은 일이라구. 니, 용타구 갸들두 말 하드라."
"그랴쥬? 시누들두 그라쥬?"
앗다. 만석이가 신이 나서 열변을 토한다. 역시 영감과 이야기하는 것보다 엄니가 훨씬 시원하다.
"내나 하니께 그짓 하구 살았슈. 이제는 더는 못혀유."
그래도 엄니 죽을 쒀야 하니, 아드님의 돌솥밥을 졸업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마 그렇게 말씀드리면,
"나, 죽 안 먹어도 되어~. 난, 밥 먹을 것잉께 애비 밥 따로 앉혀 줘~."하실 걸?!
엄니요. 이제는 참말로 안 할라요. 내 새 며느리 얻어서 신상 볶는 일은 안 해야지요. 이제부터 적응기간이예요. 엄니나 애비 따라 진지 적게 드시지 마시라요. 적게 드시면 이번에는 며늘 년이 가만 안 있을 겨유~. 애꿎은 엄니만 가지고 닦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