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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는 왜? (1부 제32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BY 만석 2009-09-10

 

1부 제32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사람은 할 일을 다해놓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뜻이렸다. 알량한 지식을 동원해 보자면, '나도 사람이다. 고로 나도 내 할 일을 다 해놓고 하늘의 명을 기다리라,'는 말이거니. 요즘 들어 자꾸만 <盡人事待天命>이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내 할 일이 하나씩 둘씩 줄어드는 것이 감지되기 때문일까? 옳거니. 그래서 내 심사가 편안치를 않은가? 내 곁을 떠나가는 사람들, 일들, 문제들 등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말씀이야.

  결혼을 한 큰딸아이야 아직 많이 젊어서, 미처 <盡人事待天命>까지를 논할 나이가 아니다. 이제부터 아이들이 내 곁을 떠나기 시작하는구나 하는 생각뿐이었구먼. 어린 나이에 결혼을 시키는 것이 안Tm러운 마음이었으나, 제 어미보다 대범한 모습으로 나를 한도했다. 그래도 <盡人事待天命>까지는 아직 생각도 안 했구먼. 두 딸을 낳아 어찌나 살뜰하게 키우는지, 이제는 에미 없이도 잘 살겠구나 하는 마음이었지. 지금처럼 서운하거나 서글픈 마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견했다는 표현이 옳겠다.

  큰딸아이가 내 곁을 떠나고, 뒤 이어 내 곁을 떠난 아이는 막내아들이었다.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군에 입대하니, 어려운 훈련이 걱정이고, 보고 싶은 것만 걱정이었다. 2년 뒤에 다시 에미 품으로 돌아올 기약이 되어 있는 이별이었으니, 내 할 일을 다 했다는 마음도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제대와 더불어 대학졸업을 같이 할 만큼 억척스러운 면을 보이는 녀석에, 이는 대견하다기보다는 놀라운 서글픔이었다. 가장 어린 막내가, 언제나 늙은 내 가슴을 짠하게만 하던 녀석의 믿음직스러움이, 차라리 에미가 필요치 않은 녀석으로 성장했음을 과시하는 것만 같았다. 이 녀석도 머지않아 이 에미 곁을 떠날 녀석임을 확인하는 꼴이었다.

  사 남매 중 유일하게 긴 시간을 내 곁에 머무는 큰아들 녀석도, 퇴근 뒤 저녁 식사를 끝내면 얼굴도 얻어 보기가 힘들다. 서른을 넘긴지 세 해나 된 청년이니 담배도 태우고 술도 마셔야겠지. 에미가 몰랐으면 싶은 상대와 전화 통화도 해야겠고……. 하루 종일 업무에 힘들었을 테니 제 휴식으로 컴을 켜고 앉았기도 할 것이고. 그러려니 하면서 에미는 다 큰 녀석 방을 왈캉 벌컥 열어보지도 못한다. 가까운 사이 일수록 예의를 지켜야한다지 않는가. 그만 해도 벌써 에미와는 멀어져서, 이제는 나 없이도 살아가려니 싶다. 녀석의 당연한 변화를 서글픈 마음으로 보는 것은, 나의 부족한 인격과 마땅치 않은 소양 때문이겠지.

  얼마 전에는 막내 딸아이가 독립을 선언하고 집을 떠났다. 아직 결혼 전이니 에미 옆에 있어도 좋으련만, 더 넓은 세상을 꿈 꾸는 아이의 대망을 바라는 마음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나이 30이 적지 않으니 혼자도 충분히 살아갈 영악한 아이라고는 했다. 그녀와의 이별을 미처 준비한 바 없는 에미로서는 그 독립이 탐탁치가 않다. 그리 아니 해도 곧 에미 곁을 떠날 나이거늘……. 그만 해도 에미 없이 살만 하다 하는 것 같아, 그 아이를 위해 내가 할 일을 다 했는가 싶어 서글프다. 아니, 아직 해 주어야 할 일은 많으나, 해 줄 수 있는 기력이 더는 없음이 서럽다. 내 마음에는 아직도 어리광 부리던 아기인 채인데…….

  또, 엊그제까지만 해도 2시가 되면,
  "할머니!" 소리치며 문을 열던 외손녀 딸아이도 보이질 않는다. 방과 뒤에 내 옆에서 수학을 과외로 배우고, 한자 공부를 같이 하고, 숙제를 펼쳐 사인을 받더니……. 방학을 했으니 개학을 하면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도 좋으련만, 개학과 함께 아이는 전학을 간다 한다. 이제 더는 간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족하고, 내일의 준비물을 챙기지 않아도 좋으니 편하다 할 수도 있을 것인데, 시계를 올려다보는 마음은 허전하기만 하다. 큰딸아이가 에미 덕을 보겠다며 큰집을 세놓고 내 곁에 세를 살더니, 이제는 직장을 그만 두고 아이들을 건사 해야겠다 한다. 그래서 다시 제 집으로 들어가, 아이들을 전학시키겠다고? 이만 해도 내 소임은 끝이 났는가 싶어 조금은 서운하다.

  행사 때마다 아이들의 무대의상이니 리셉션용 의상이니를 지어 입히던 일도 이제는 내 힘에 붙인다. 떨어진 시력도 문제려니와, 기운이 딸리는 것은 어찌 해 보는 재간이 없다. 아직은 젊은이들보다 자신 있던 디자인도, 아이들의 취향에 따르지 못할 것이 뻔하다. 이만 해도 이제는 내 할 일이 아닌 것 같아, 자신 있게 아이들에게 내 재주를 권하기가 쑥스럽다. 이도 이제는 내 곁에서 멀어져가는 서글픔이다.

  <盡人事待天命 >라.
  내게 주어진 하늘의 명은 언제나 떨어지려나? 사람들은 내가 내 친정어머니의 외모를 닮았다고들 한다. 어머니의 고운 자태를 내가 반이나 따르겠는가마는……. 뭐. 그렇다고 치자. 외모가 닮았으면 대부분 속도 닮는다고 한다. 그래서 내 친정어머니의 장수를 내 명에 비하고는 한다. 그러니까 적어도 아흔 여섯 살은 족히 살 것이라는 말이렸다. 그렇다고 치기로 했으니, 내 명은 아직 이십사 년은 족하겠구먼. 아이들이 들으면 기절하겠다. 그래도 그렇다고 치기로 했으니, 족히 이십년만 계산하자.

  그렇다면 나는 아직 하늘의 명을 기다리기에는 젊다. 아니, 어리다. 그러면 나는 이십 년 동안 뭘 할꼬? 무엇을 더 해야 할 일을 다해놓았다고 할꼬?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큰소리 치며, 하늘의 명을 기다릴 수 있을까? 큰아들 녀석이 결혼을 하면 손주도 봐 줘야 하고, 막내 딸아이가 아이들 낳으면 그도 봐 주고 싶다. 막내 아들 녀석의 아이들이라고 남에게 맡기고 싶겠는가? 그도 내 손으로 키워주고 싶은데……. 그때쯤이면 내 손주의 에미들이 내게 맡기지도 않으려 들겠지? 눈꼽은 줄줄이 꿰차고 두 손은 벌벌 떨리고 시원찮은 시력으로는 깔끔도 떨지 못할 것이니…….

  그러구 보니 엄니는 할 일을 다해놓으신 겐가? 더는 할 일이 없어서 앉아만 계시는 걸까? 그리고 명을 기다리시는 걸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엄니는 기력이 없어서 못하시는 게다. 그러구보니 다 해놓아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은 다르구먼, 다 해놓아야 할 일은 '임무' 즉 책임이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러니까 다 해놓아야 할 일 즉 책임과 의무는 자식을 키워서 결혼을 시키는 일까지이겠다. 손주를 기르는 일은 책임을 다한 다음에 가지는, 다만 내 희망사항일 뿐이다.

  "엄니요. 엄니는 하실 일 다해놓으셨습니다. 다섯 누이들 모두 종가 댁 맏며느리로 보내셨고, 하나 아들의 알량한 며느리라도 보셨으니 할 일 다해놓으신 겝니다. 더욱이 아들 며느리, 책임 없는 손주들까지도 배 불리 평생 먹을 것 물려 주셨으니, 일 없이 앉아 노니실 자격이 충분하시구먼요. 당당하게 대우 원하셔도 됩니다. 소양 없는 며느리 눈치 보실 일이 없으십니다. 기력 튼튼히 하시어 별 볼 일 없는 며느리에게 호령하소서. 부디 평안한 여생 지내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