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제20회
그럴만 혔어
엄니 수저 위에 김을 얹어드린다. 다음 수저에는 말랑한 두부도 한 점 올려놓는다. 아무 소리도 없이 잡수시던 엄니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신다.
“와 그라는 겨.”
“원제는 안 그랬슈?”
그러구보니 평소에 아주 잘 해드리는 며느리 같구먼.
다시 두부를 얹어드리자,
“어여 니나 먹어.”하신다.
“아침에 한 소리 하고는 맘이 짠해서 그려요.”
“아침에? 미라 그랬는디?”
그새 잊으셨나 보다. 그는 다행이다. 섭섭하셨으면 마음에 꼭 새겨두시는 엄니고 보면, 아침의 일이 과히 섭섭지는 않으셨던가 보다. 사람이 제 주변에 일어났던 일을 잊지 않고 모두를 기억한다면, 머리가 터져나갈 것이다. 잊고 살 수 있게 만드신 조물주 우리의 하나님은 참으로 기묘하시다.
“그새, 잊으셨슈?”
섭섭하셨을라 걱정이었을 량이면, 잊으신 일을 굳이 들춰낼 것은 또 뭐람. 참 내 모자라는 만석이의 심성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침에 점심 밥 챙기구 나가라 해서, 지가 성질 부렸잖유.“
“…….”
잠시 말이 없으시더니, 다시 입을 여신다.
“그럴만 혔어. 니가 아침엔 그럴만 혔어.”
이건 또 무슨 괴변이신가. 아니, 그럴만 했다는 말은 내가 아니, 당신이 잘 못하셨다는 반성이렸다?! 이렇게 되면 재미가 없다. 아침에처럼 당당하셔야 내가 할 말이 먹혀들지 않겠는가 말이다.
언제나처럼 나의 아침은 부산하고 바쁘다. 엄니의 점심을 챙겨놓을라 치면 엄니는 언제나 말씀하신다.
“어여 나가. 점심은 내가 챙겨 먹을 팅게. 앉아서 해주는 밥만 축내는디, 점심도 못 챙겨 묵겄냐.”
그런데 오늘 아침은 평소와 아주 다르셨다. 밥솥에 물을 부어서 불으면 그 밥을 끓여놓고 나가라 하셨다. 어느 천 년에 그 밥이 불어서, 어느 천 년에 끓여까지 놓고 나간단 말인가.
“밥만 축내는 늙은이는 이제 죽어야 하는디.”
“내 밥 챙기러 들어오믄 얼마나 눈치가 보이는지 몰러.”
“내 밥은 신경도 쓰지 말거라이.”하셨던 엄니시다 그래서 노래처럼,
“왜 이리 못 죽을꼬.”하시던 엄니시다. 그런데 오늘 아침엔 그리 말씀을 하셨던 게다.
“엄니의 이중성은 못 말려요. 이랬다저랬다 하시니, 원......”
며느리는 이렇게 쏘아 뱉으며 현관문을 나섰던 게다. 그리고 하루 종일 그 일이 마음을 찡하게 만들었던 것이고.
나도 참 못 났어라.
“아침에 일은 내가 잘 못혔슈.”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될 것을……. 목젓을 올리다가 내려가고 마는 한 마디. 그러니 만석이는 못 났다 할밖에. 베란다 창가에 서서 푸른 하늘에 나르는 뭉게구름을 향해 소리도 없이 외친다.
“엄니. ‘니가 시에미한티, 그럴 수가 있는 것이여!’라고 소리 지르실 때가 더 좋았슈.”
어쩌자고 내 눈 속에 잠긴 저 하늘엔 뽀얀 안개가 지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