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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는 왜? (1부 제17회) 나, 잘했쟈?


BY 만석 2009-08-03

 

1부 제17회

나, 잘했쟈?

  오늘은 인터넷 동우회의 정기모임이 있는 날이다. 두 달 건너 셋째 수요일은 천하에 없는 일도 마다하는 날로 정해져 있다. 다른 회원들은 몰라도 만석이는 그렇다. 지난 번 모임이 끝나면 다시 모일 셋째 수요일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를 않을 만큼 내 생활의 많은 비중을 갖는다.

  그런데 셋째 수요일인 오늘. 천하에 없던 일이 생겼다. 시외삼촌의 생신이 겹쳤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야 알았지만 구십을 바라보시는 엄니의 친정 일이니, 한 번쯤 무시하자고 마음먹었다. 영감도 내 생각을 마다하지 않는 것 같았다. 흔쾌하게 내 판단을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대로 무난하게 지나 갈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도 엄니의 눈치가 보이기는 했다. 엄니의 기분이 그리 썩 좋지는 않아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오늘 아침.
  분 바르며 꽃단장을 하는데(해 봤자지만), 엄니가 반색을 하며 말을 거신다.
  "이~. 에미 마정 가는겨? 그랴. 가믄 좋제."
  엄니는 혼자 좋아서 거실의 탁자를 맴맴 도신다. 에구구. 큰 일났다. 어쩐다? 토닥거리던 분첩을 들고 멍청하게 거울 속의 만석이를 들여다본다. 딱하다. 저승사자 같이 허옇게 뒤집어쓴 몰골. 눈썹이 아직 그려지지 않았다고 꼴이 이럴 수가. 루즈를 문지르지 않았다고 이런 이런, 이럴 수가. 그러나 마음은 그보다 더 처절하다.

  아니다. 나는 지금 정수리에 쥐가 날 정도로 사태수습을 위해 머리를 회전하는 중이다. 아무튼 정해놓은 결론은 향기방의 정기모임에는 꼭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 모임에 갔다가 좀 일찍 일어나서 시외삼촌댁으로 향한다?! 괜찮은 생각이다. 오늘은 찜질방엘 간다 하니, 찜질방은 빠지고 일찍 일어나자. 계산을 다져하니 마음이 급하다. 좀 일찍 나서서 회원들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모이면 그저 좋고 쳐다보면 더 좋은 회원들. 하나 같이 반가워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포옹을 한다. 네 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얹어도 좋고, 내 이야기에 네 이야기를 얹으면 더 좋다. 당초에 일어나려던 12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10분. 또 10분. 그래도 아쉬워서 또 10분만. 이제 더는 용납이 안 된다. 일어나는 나에게 회원들의 아쉬워하는 눈길이 쏟아진다. 씁쓸한 기분으로 모임을 떠나 타박타박 전철역으로 향해 걷는다.

  시외삼촌댁엔 거의 저녁 무렵에야 도착하니, 큰 손님은 이미 파하고 집안사람들만 그래도 아직 시끌벅적 하다. 내가 대문을 들어서니 당신네 따님 모시는 사람이라고 대우가 황송하다. 엄니에게 잘 해 드리지 못한 것을 나무라는 것 같아서, 계면쩍기 이를 데 없다. 에구구. 앞으로 잘 해 드리라는 무언의 압력이련가?! 바리바리 엄니 몫으로 싸주시는 떡이며 묵이며 별미 음식을 들고 집으로 향한다.

  저녁이 겨운 시간. 엄니가 시장하셨던 모양이다. 묵을 무쳐드리니 제법 포식을 하신다. 워낙 묵을 좋아하셨으니까. 두루두루 안부를 물으시며 좋은 기분이 역력하시다. 당신의 친정에 다녀온 며느리가 과히 밉지 않으신가보다. 이제는 친정일은 잊으셔도 좋을 연세라고, 며느리도 시어머님의 친정일쯤은 챙기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고 말하려던 내 작심은 차마 들어내지를 못하겠다. 저리 좋은 엄니의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서 말이지.

  저녁에 퇴근해 온 남편이 떡을 내려다보면서 환한 표정으로,
  "삼촌네 다녀왔어?"묻는다.
  "그려유."
  "모임엔 안 가구?"
  "안 갔슈! 아니, 못 갔슈!"
  "……."
  그이가 할 말을 잊고, 의외라는 표정을 한다.

  "모임에 얼굴만 보이구 마정으로 뛰었슈."
  "으~응. 그랬어?"
  아주 흡족한 얼굴이다. 아주 잘한 일이라고 칭찬을 해 주어도 좋으련만……. 남편의 저녁을 챙기며 혼자 생각한다. 잘한 일이다. 만약에 모임에 눌러 앉아 있다가, 시외가 댁엘 다녀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엄니는 심사가 곱지 않으실 게 뻔하다. 영감도 과히 좋은 기분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엄니도 그이도 입이 귀에 걸려 있다. 내가 커피 한 잔을 콜 해도 어렵지 않게 대령할 것 같은 분위기다. 어디 한 번,
"아빠. 나, 커피!"해 봐봐?! 히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