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제16회
당신은 더 할 걸?!
엄니가 다른 날 아침보다 일찍 나와 거실에 앉으신다. 9시가 넘어야 엄니의 방문이 열리던 데에 비해, 8시에 나와 앉으셨으니 무척 이른 셈이다.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시니, 재촉해 깨울 수도 없는 노릇. 아침 출근을 서두르는 나로서는 날마다가 난감하다. 오늘 따라 신문을 뒤적이신다. 무슨 일일까? 특별히 찾는 기사라도 있으시다는 말인가.
"에휴~, 이런 거라두 읽을 수 있음 심심찮구 얼마나 좋을 겨."
엄니의 한숨이 마루에 닿는다. 오늘 아침엔 도통 엄니의 거동이 수상하다.
"엄니요. 뭐 보실 게 있으셔요?"
"아니. 그냥 글이 보였으면 좋겄다는 말이제. 그라믄 하루가 지겹지 않을 것 아닌가."
"……."
나도 돋보기 없이는 보이지 않는 신문의 기사를, 당신이 읽기를 바라신다니…….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말이겠다. 기가 차다.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연다.
"엄니요. 그 글자가 지금 엄니 눈에 보이시면 큰 일이 나지요."
"……."
"며느리도 보이지 않는 글자를 읽겄다 하시믄 욕심이지요."
"……."
"엄니가 그 글자를 읽을 수 있으면, 내일부터는 엄니가 내 수발을 드셔야겠네요."
"……."
"우째 그리 욕심을 부리신다요. 아니, 엄니가 지금 그 글이 안 보인다고 속을 끓이시다니요. 며느리도 돋보기로 보는 글을 말이지요."
"……."
"엄니 연세가 월마유."
"……."
엄니도 딱하시지만 만석이는 더 딱하다. 신문의 글이 보이지 않는다고, 엄니가 날더러 뭘 어쩌라는 것도 아닌데 어쩐 투정이 이리도 길었는고. 저도 그럴 날 멀지 않았는데 말이지. 진즉에 알아본 일이지만, 만석이가 못 됐기는 참 많이 못 됐다.
이쯤 만석이를 나무랐으니 이젠 엄니도 좀 나무라자. 그래야 공평하지 않은가 말이다. 사실로 말하자면 그 연세에 신문의 글을 읽겠다 하시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이 아니신가 . 내가 왜 늙는지 모르겠다는 말씀과 뭣이 다른가. 엄니의 병은 당신의 나이를,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늙을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데에 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이리 눈이 잘 안 보이고, 왜 하필이면 내 다리가 아파야 하는가 하고 속을 끓이신다. 이럴 때에는 도통 내 엄니 같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내 엄니가 지나치다 싶게 현명하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나만 아니, 다른 사람은 다 괜찮은데, 당신만 그렇게 늙는다고 생각하시는 데에 엄니의 문제가 있다.
그이와 앉아서 엄니의 이런 문제를 걱정할라치면, 그이는 비아냥 섞인 말투로 입을 씰룩거리면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당신은 더 할 걸?!"
"……."
정말일까? 나도 그럴까?
"그래? 나도 그럴까? 그렇게 생각해?"
"……."
내 상한 비위를 읽었는가, 내 시무룩한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한참이나 말이 없던 그이가 조심스럽게 다시 말문을 연다.
"사람은 누구나 다 늙지. 그래두 나만은 늙지 않기를 바라는 게 인간이구. 그래서 나만은 늙고 병들지 않고 싶어 하는 게 남한테는 욕심으로 보이는 게구."
"……."
말없이 팔짱을 끼고 앉은 만석이를, 그이가 눈치스럽게 내려다본다.
"여보. 나도 정말 그럴까?"
오늘, 이 밤은 어쩌자고 이리도 더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