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제14회
엄니 탓이라요~!
인터넷 동우회의 아우님이 국제 미술 전시회를 갖는다 한다. 옳거니. 오늘은 그녀를 위해서 시간을 좀 내 주자. 겹쳐진 약속을 아침으로 당기고, 가게의 일은 이른 오후에 처리하기로 계획 완료. 출근하는 남편에게는 저녁의 귀가가 늦을 것이니, 밖에서 저녁식사를 해결 하든지 집에서 해결하든지 재량에 맡겼겠다. 물론 엄니는 밥도 국도 반찬도 여유가 있으니, 챙겨 드시도록 엄명(?)을 드렸다. 나가면서 아들에게도 저녁을 해결하도록 하고. 아이구 이쁜 녀석. 이 녀석은 언제나 제 밥걱정은 하덜 말라니 고마운지고.
워낙 미술에 상식이 없으니, 작품 앞에서 맴돌기도 어줍지 않다. 저 그림을 거꾸로 붙여놓은들 내사 알아 볼 재간이나 있겠는가 말이다. 그림을 전공한 아우님의 재주가 부럽다. 사실은 나도 미술시간에 썩 잘은 아니어도 간혹 칭찬을 듣기도 했었는데……. 아우님에게 저녁 대접을 하겠다던 우리의 계획이 무산 됐다. 오히려 그녀들의 준비로 하객들의 식사까지를 융성하게 준비하고 있었으니.
부른 배를 두드리며 바쁜 아우님을 위해 빠른 걸음으로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우리에게 신경을 쓰느라고 그녀가 부산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저녁밥에서 해방이 된 우리는, 너도 나도 아직은 집으로 향하기가 아쉽다. 하여 오랜만에 명동을 걷겠다고 시청 앞을 지나다가, 그만 분수의 소용돌이에 넋을 잃고 말았다. 잔디도 좋고 바람도 좋고, 해 사라진 야경의 시청이며 호텔의 전경도 좋을시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잔디에 손수건을 편다. 먼 거리는 아니라도 이만큼 걸었으니 중늙은이 나이에 당연히 앉고 싶지. 자리만 깔았다면 눕고 싶지는 않았을까. 이리 등을 돌려도 배경이 좋고 저리 등을 돌려도 배경은 짱이다. 까짓 아무려면 주름살까지야 밝히지 않겠지. 이리 찰칵 저리 찰칵. 폭 넓은 치마를 맘껏 펼쳐놓기도 하고, 두 손가락 세워서 V자도 그리며 포즈를 잡아본다. 으하하 언제 적에 해 본 일이었을까? 얼마만의 희열인고.
엉덩이가 축축해지며 한기가 든다. 이제 이쯤이면 눕고 싶어서일까? 안녕 빠이빠이 손 흔들며 헤어지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만석이 마음이 허하다. 엄니 잘 드시는 단팥빵 한 보따리를 들고 집으로 향한다. 대문을 들어서니 10시 40분. 어~라. 아직 그이가 귀가 전이다. 아니, 저녁을 해결하라 했더니 술타령인가? 전화를 걸어 어디냐고 물으니 강변역을 지나는 중이라 한다. "저녁은?" "안 먹었지." 허허 참 나.
에구. 40년 지켜 온 그 버릇이 오늘이라구 달라지기를 뭘 바래. 투덜투덜 저녁을 앉힌다. 팔자타령을 하며 말이다. 뱅어포를 굽고 가지나물을 볶는다. 알량한 멸치 배를 비틀어 가르며 분풀이를 한다. 이럴 땐 밖에서 좀 해결하고 들어오면 어떨꼬. 외식하다 죽은 귀신은 아직도 떼어 버리지를 못하는 그이가 야속하다. 물론 나보다 일찍 귀가를 했더라면, 나를 기다리고 앉았을 그이는 아니다. 김치 하나에 밥을 먹어도 집 밥이 좋다는 데에야……. 누구 나처럼 사는 여자 또 있을까? 아우님들아~이렇게 사는 성님도 있다. 그러나 더 미운 건 엄니다. 우째 그리 버릇을 들여놨을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