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의 “소나기”하면 나는 제일 먼저 그애가 떠오른다
순하디 순해보이던 그애의 진한 속눈썹과 수줍게 웃곤하던 잔잔한 미소
오랜 시간이 흘러 그애의 몸이 훌쩍 커지고 수줍게 웃던 모습도 내 기억속에서 빛이 바랠쯤 낯선 모습으로 내 앞에 우뚝 다가선 그애를 만났다
다소 냉랭한 기운까지 감돌던 긴장속에서 해후를 했지만 서로 한마디 말도 건내지 못하고 쭈뼛거리다 뒤돌아 선 후 그후로 다시는 만난적이없다
결혼후 첫아이를 낳고 얼마나 지났을까
우연히 전화번호를 알게되어 그애와 통화를 하면서
내가 사는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여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그애는 그런말을 했다
여학생들이 첫사랑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라대면 가끔 내 얘기를 해준다고....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뒤에야 그애에게 듣는 첫 번째 고백이었다
어른이 되어 지난날의 추억들이 무슨 특별한 이유를 가질까만서도
잠시 반가운 마음에 한번 만나야 되는거 아니냐고 웃으며 말했다
서로의 생활이 있고 배우자까지 겸비한 우리에게 추억이란 어찌보면 특별한 것일수도 있고 아니면 아무것도 아닐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오래된 낡은 사진첩에 들어있는 수백컷 중의 일부일거라는 그래서 그것이 대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 즈음 우리의 통화는 끝이 났고 그애는 또 다시 내 기억 한 켠으로 비껴나고 말았다
하지만 난 지금도 가끔 추억을 더듬다보면 언제나 내 맘 한켠에 오도카니 자리잡고 있는 그애를 만난다
선생님들의 가벼운 장난이 아니었어도 같은 반 아이들이 히죽거리며 얼레리 꼴레리 하며 놀리지 않았다 해도 난 그애가 내게 보내던 그 눈빛의 뜻을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그애가 내 첫사랑일거라는 막연한 상상은 그애의 눈길이 내게 꽃힐때마다
두근거리던 느낌을 그 뒤 여러해가 지난뒤 다른 사랑을 알고 나면서 부터였을거다 하지만 10살을 갓 넘긴 그애의 시선에서 느꼈던 그 막막했던 심정들
불안처럼 설레던 그 느낌들은 그 후 어디에서고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런 말도 그 어떤 우연도 없던 우리가 그저 수업시간에 잠깐,아니면 등하교길에 우연이 마주치면 아는체도 않고 스쳐가던 그 눈빛에서 우린 서로의 대해 마치 너무도 많은 것을 아는 듯, 그래서 아무말도 필요치 않는 오래된 연인들처럼 그렇게 시큰둥하게 지나쳤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인생의 아주 짧은 순간이었던 그 시간들속에서의 그 애와의 기억들이
이토록 오랫동안 탄탄한 실타래같이 이어져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건 마치 아주 긴 끈처럼 내가 아무리 멀리 가도 너풀너풀 끝없이
따라올것만같다
40이 되어가는 불혹의 나이에도 어쩌다 생각나는 그아이의 모습은
앞으로 더 나이가 들어가며 감이 익어 홍시가 되어가듯 내머리가 하얗게 익어가게 된다하더라도 어쩌면 그 시간의 기억들은 언제나 싱싱하게 푸르를 것이다
멈추어 버린 시간속에서....
언제나 푸른 소나무처럼...
소나기와 그애와는 무슨관계....
그애가 살던 마을은 동네에 유일하게 놓여져있던 다리를 지나 한참을 걸어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여름철 물난리가 날때마다 다리는 가끔 잠기기도했다
물난리가 나면 아이들은 물이 불어난 다리 근처로 가서 주워온 나무나 돌을 던지며 물살의 세기를 가늠해보곤 했다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세차게 불던 어느날
다리 건너에사는 친구 몇명이 학교에 오지 못했다
그애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내 작은 방 구석에 쳐막혀 괜한 심퉁을 부렸다
나무책상이며 나무 문짝에다 새까맣게 연필로 그어댔다
친구들이 다리근처에 놀러가자며 찾아왔다
난 가지 않았고 그애들이 모두 물에 힙쓸려갈거라는 상상을했다
밤새 내리던 비가 새벽녁이 되어서야 잔잔해지자 나는 돌연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에 해가 떴다
물살이 걷히고 불어난 물이 점점 줄어든다는 말을 아침에 아버지한테 들었다
밥을 먹으면서 아버지는 다리 건너 학생들이 학교에 올 수 있을거라고 말했다
나는 밥숟가락을 아무도 몰래 밥상에 올려놓고 바쁘게 학교로 달려갔다
자기에게 맞는 삶을 살아가듯 사랑에 있어서도 누구나 그러할것이다
꿈결인듯 신비스럽게 또는 너무도 뚜렷한 흔적을 남기며 저마다 경험을 하겠지만 성장은 구속이다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잡아야하고때로는 모질게 붙잡아 두어야하고
그래서 자신의 경험들을 잘 다듬어 반듯하게 포장을 해야한다
어떤 기억이든 그대로 다 기억하는 일은 없다
모두가 아름다운 기억만 하게 되기를...
비가 온 뒤 티없이 맑은 하늘을 보며 우리는 비의 지저분한 흔적 정도는
말끔히 잊는다
비가 온 뒤에는 항상 하늘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궂은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려는 깨끗한 시선에서
저마다 가슴속의 추억들은 언제까지고 아름다움으로만 채워질수 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