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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체할머니


BY 박예천 2015-05-26


                                얌체할머니





사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연로하신 어른 호칭 앞에 붙여줄 만한 별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얌체라는 아주 적합한 말이 뇌리를 스치며 훅 튀어나왔다.

매번 반복되는 그 상황을 바라보며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조잘거리자고 내 가슴 복판에 외쳤다.

하여 지금 이렇게 한 할머니의 얌체 행동을 옮겨볼까 한다.

 

할머니는 공원길 마을 빌라에 산다. 한 때는 내가 예삐할머니라는 애칭으로 부르곤 하였다.

우리 집 견공이 무단가출을 한 적이 있다. 늦은 저녁에 일어난 일인데, 다음날 새벽까지 행방이 묘연하여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어슴푸레 아침이 밝아올 즈음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허겁지겁 뛰어나가 보니 할머니 품에 우리 강아지가 안겨있다.

얘긴즉, 골목에서 길 잃은 강아지를 보았다는 것. 주인을 알 수 없어 자기 집에 데려가 한 밤 재웠는데, 근처 누군가가 우리 집 개라고 알려주었다는 것.

아휴! 집을 찾아서 다행이네요. 내가 강아지 이름을 몰라서 그냥 예전에 키우던 개 이름으로 불렀어요 예삐였거든. 어젯밤 소고기도 주고 내 옆에서 잘 재웠다우!”

정말 고맙다고 고개를 연신 꾸벅이며 감사 인사를 했었다.

그 날 이후, 우리 가족은 그분을 예삐할머니로 불렀다.

이웃 간의 정을 느끼게 하는 고마운 할머니로만 그려졌던 분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각인되었던 따스한 감정의 골이 어긋나는 실망스런 모습을 보게 된다. 배려 깊은 표정과 잔잔한 웃음 뒤에 가려진 것을 자꾸 나한테 들킨다.

강아지 두어 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시간에 산책삼아 끌고 나온다. 물론 끈에 묶여 있긴 한데, 배설물을 아무데나 흘려놓고는 유유히 사라진다. 몇 번이고 계속되는 그 행동을 보면서 많이 의아했었다. 가장 바르게 사는 척, 정도를 지키는 척 하는 걸 보았기에 더욱 어이가 없었다.

 

예삐할머니에서 얌체할머니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것은 마땅히 그럴만한 행동이 있어서다.

아들의 통학버스 시간이 되면 나는 우리집 강아지를 끌어안고 큰 도로변 정류장으로 간다. 매일 아침마다 벌어지는 일상이다. 함께 차타는 특수학교 후배녀석이 우리 강아지 보는 일을 좋아해서 데리고 나간다. 버스가 도착하기 전, 아들과 후배까지 정류장 의자에 앉아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웃고 떠든다. 그러는 시야 사이 일정한 간격에서 항상 보이는 그림이 있다.


버스정류장 바로 옆에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쓰레기통이 있다. 시청에서 설치한 것으로 봐서 행인들이나 승객들의 쓰레기를 담는 용도인 것이다.

말하자면, 개인 소유의 쓰레기통이 절대 아니다. 날마다 같은 시간에 예삐할머니가 아니, 이젠 얌체 할머니가 개를 안고 한 손에는 정체불명(?)의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등장한다.

처음엔 우연이겠거니 여겼다. 길가에서 주운 쓰레기를 모범시민답게 도로청결을 위해 선행으로 버려주나 보다 했다. 정류장 나무 의자에 아이들과 앉아있노라면 가끔 시선이 부딪힌다. 그럴 때마다 활짝 웃으며 목례로 눈인사를 하곤 했었다. 오늘부로 그 인사도 내 쪽에서 확 접어버리기로 했다.

앞집 새댁에 말을 들어보니 하루 동안 생긴 자기 집 쓰레기를 모았다가 이른 아침마다 강아지를 끌어안고 산책시키고 버스정류장 공공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것이다. 종량제쓰레기 봉투 값을 아껴보겠다는 심산이다.

  

물론 내가 얌체할머니를 흉볼 만큼 양심의 사람으로 독야청청 살아왔다고는 자부할 수 없다. 기억할 수는 없으나 무심코 비양심적인 행동을 했을 경우도 있었겠다.

당장 눈앞에 작은 이익을 바라보며 고소해하는 순간, 그로 인해 어느 한 사람에겐 고충이 생기거나 피해를 본다는 생각은 못하는가.

별거 아니라고 치부하겠지만, 내가 장담하건대 몰래 갖다 버리는 쓰레기 분량만큼의 불편한 상황이 살면서 얌체할머니에게 꼭 생길 것이다. 악담이 아니고 인생사 다 그렇다는 얘기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누리도록 창조된 세상이니까.

 

제발 부탁이건대, 그렇게 살지 좀 마쇼!

내일 또 그러면 인사 안 하고 째려볼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