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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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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부(村婦)의 일기


BY 박예천 2013-09-26

 

부(村婦)의 일기

 

 

 

밭뙈기 하나를 사서 농사짓기 시작한지 올해로 두어 해가됩니다.

대단한 특용작물을 키운다거나 대량 수확을 계획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저 내 가족 식탁에 좋은 먹을거리나마 올리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겁니다.

소일거리삼아 하는 것이라 애초부터 욕심이 없었습니다.

실험정신에 입각하여 거름이나 재배방법도 마치 연구하는 자세로 임했지요.

남편은 컴퓨터에 농사계획이나 파종시기, 해충제거 방법을 꼼꼼하게 저장합니다.

곁에서 부속품처럼 따라다니는 저는 그저 보조업무만 하면 됩니다.

헌데, 말이 보조이지 노동량이 엄청나더군요.

농기구 전부가 수동이다보니 전부 사람의 팔 힘으로 일궈야 합니다.

괭이 들고 남편이 먼저 돌이 지천인 밭에 고랑을 만듭니다.

뒤따라 쪼그려 앉은 제가 손가락으로 돌을 골라내며 씨앗을 뿌리지요.

생전 해보지 않았던 일이라 조금은 두렵기도 했습니다.

과연 내 손에서 떨궈진 씨앗에서 싹이 나올까 하는.

 

부부가 밭에 나와 각자의 소임(?)을 하다보면 적막강산이 따로 없습니다.

저만치 떨어진 거리에 남편이 앞서 자기 분야의 작업을 하고 저는 또 자질구레한 일로 바쁘지요.

서로 대화도 없이 묵묵히 움직입니다.

뼈마디가 욱신거리고 근육통이 와도 농사는 참 매력 있는 일입니다.

머릿속에 오만가지 근심과 잡념들이 정리되는 시간을 벌어줍니다.

씨앗심고 솎아주며 잡초를 뽑다보면, 찌들어있던 복잡한 머릿속도 헹궈지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어릴 적, 울 엄마는 이담에 너 크면 절대로 농사짓는 남자한테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했는데 저는 교사와 결혼했음에도 점점 초보농사꾼이 되어갑니다.

어머니에겐 평생 지긋지긋했을 농사일 해보겠노라 설치는 딸이 조금은 못마땅한지 전화로 궁금한 걸 물어보면 퉁명스럽게 대답하십니다.

푸성귀며 열매들을 보퉁이마다 싸주던 재미가 이젠 없어져서 그런가봅니다.

친정에 손 내밀지 않고 오히려 우리 밭에서 나온 것들을 보내줄 정도가 되었으니까요.

작년엔 메주콩 수확이 좋아 시어머니가 장을 많이 담그기도 했답니다.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니 온갖 벌레들이 먼저 시식합니다.

그 나머지를 우리가 먹는 셈인데, 모양도 크기도 형편없지만 맛은 끝내줍니다.

평소 고마웠던 지인들에게 조금씩 보내주고 나눠 주다보면, 천하에 부자가 부럽지 않습니다.

땀방울 모아 정성들인 것들이라 건네주는 마음에도 더한 기쁨이 있습니다.

때로는 가뭄으로 바싹 타죽어 버리고, 어느 계절엔 과한 장맛비에 녹아내리는 채소도 있습니다. 애지중지 키운 것들이 제 모양을 갖추기도 전에 사라지기도 하지요.

 

세상살이 어리숙한 저는 농사 조금 짓다가 거대한 섭리를 먼저 배웁니다.

농사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힘들여 허리 굽히고 괭이질, 호미질에 거름도 잘 했다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적당한 햇볕과 하늘거리는 바람이며 영양분이 스며있는 빗줄기는 천지가 개벽을 해도 나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마침내 남겨진 결실을 겸허한 마음으로 거두는 일만이 촌부인 저의 몫이지요.

손목이 시큰거리도록 폴 포기를 뽑다가도 겸손하게 머리가 숙여집니다.

새가 쪼아 먹고, 벌레가 파먹고 그래도 남겨진 것이 있음에 감사를 배웁니다.

씨 뿌리고 가꾸며 수확의 때가 되기까지 무던히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 촌부인 제가 할 일입니다.

가장 낮게 쪼그려 엎드린 밭뙈기에서 자식들 결실의 때도 겸손히 기다려야한다고 주억거립니다.

인생살이 내가 가늠하고 예견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종합선물세트마냥 각각의 작물들이 튼실하게 자라는 밭을 바라보며,

가을걷이 앞둔 가난한 촌부의 마음은 벌써부터 바쁘게 조각나는 중입니다.

어디로, 누구에게로 나누기해야 공평할지 사랑 퍼주기를 셈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