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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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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재계약


BY 박예천 2013-03-21

1년 재계약

 

 

 

2층 공사에 매달려 하루가 어찌 가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

아들이 돌아올 시간이라 통학버스를 기다리려는데, 문득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는 걸 알게 되고 말았다.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니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나?’

답이 오기를.

‘추카추카 ㅋㅋ’

과연 나만 축하받을 일인가? 피식 거리려는데, 재차 메시지가 날아온다.

‘저녁에 외식 어때?’

장난기 섞인 답을 보냈다.

‘어...., 알았어. 내가 외식 당해줄게^^’

크게 봐준다는 식으로 문자를 보내놓고 혼자 덤덤히 웃었다.

까맣게 잊고 살다가도 오늘 하루만은, 그를 만났던 시점으로 돌아가 보는 것이다.

아지랑이 모락거리듯 아련하기만 한 일이 되었지만, 한때 나도 화사한 봄날의 신부였다.

장애 지닌 아들 녀석 태어나고 이리저리 치료길 찾아 버둥대느라 회상에 젖어보는 것도 사치로 여겼었다.

사춘기 딸아이 속이 타들어가도록 부모를 애먹이는 요즘, 더욱 부부간 의가 깊어진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당신뿐이노라 서로를 챙기게 된다.

자식도 소용없다는 어른들 말씀이 지당하신 것이로다.


퇴근한 남편과 아들, 나까지 셋이서 밤 외출에 나섰다. 야간자율학습 하느라 늦는 딸에겐 용돈조금 건넬 생각이다. 

하늘엔 반달이 걸려있고 오소소한 봄밤 한기때문인지 별들만 떼 지어 떨고 있다.

늘 가던 단골 귀틀집 레스토랑에 들어서니 지정석인 벽난로가로 안내를 한다.

신기한 모양인지 아들은 장작더미를 핥아대는 불꽃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음식을 주문하고 남편과 몇 마디 주고받던 중 툭 내던지는 말.

“우리, 식사하면서 생각해보자. 일 년을 더 살 건지 말이야!”

갑자기 너털웃음이 터졌다. 그에 질세라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럼, 저녁식사가 뇌물이야? 알았어. 먹으면서 생각해보고 결정할게!”

오가며 음식 놓던 주인아줌마가 우리부부 나누는 얘기에 웃음무더기를 포갠다.

일행인 아들도 대화 속에 끼어주기 위해 혹시나 하는 맘으로 물어본다.

“유뽕아! 오늘이 무슨 날인줄 알어?”

“네에. 결혼기념 날이요!”

“누구랑 누구 결혼인데?”

“엄마랑 아빠가 결혼했어요!”

“그럼, 엄마랑 아빠가 결혼해서 애기를 낳았는데 그게 누구지?”

“유뽕이지요!”

단순한 질문이지만 역시 대답 잘 하는 걸 보면 엄마 닮아 똑똑한 아들이다.

식탐이 많은 녀석은 어느새 제 것을 다 먹고 엄마 접시를 넘본다.

아들에게 남은 양을 넘겨주었다.


다시 부부는 얘기를 이어간다.

남편 왈,

“우리 참 오래 살았다. 가만 보면 내가 인내심이 대단한 남자야 그치?"

나 같은 여자를 참고 견디며 살았노라 큰소리친다.

어이가 없을 땐 나는 차라리 침묵으로 일관한다.

‘니가 참고 살은 거면, 난?’

 

오랜 단골이라는 이유로 주인이 칵테일 두 잔을 내온다. 공중에서 유리잔 쨍쨍 부서져라 멘트도 없는 건배를 했다.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 아는 것이 부부가 아니던가.

사랑으로 살다가, 어느새 미운정이 들어 정으로 버티다가 이제는 전우애 같은 의리로 삶을 지탱하고 있다.

식사를 끝낸 후, 디저트까지 거덜 내고 할 얘기도 떨어져 가려는데 남편이 비장한 표정으로 한마디 내려놓는다.

“자! 저녁도 맛있게 먹었으니, 어때? 일 년 만 더 살아보자구!”

“에이! 겨우 저녁 한 끼로 일 년 재계약을 하자는 말씀?”

“그래. 내년에 또 밥 먹으면서 더 살 건지 생각해보는 거야!”

“그거 좋은 생각이네. 일 년 살아보고 결정해야지....흐흐흐”

이건 뭐 계약직 사원도 아니고 참!

웃자고 해본 말이었지만, 어쩐지 신선한 기분이 든다.


그리하여, 졸지에 결혼관계를 일 년 더 유지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2013년 3월 21일

결혼기념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