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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터진 떡국


BY 박예천 2013-02-15

불어터진 떡국


 


 

교회 할머니들 기도회 식사봉사가 있는 금요일이다.

명절 끝이라 마침 친정과 시댁에서 얻어온 김치만두가 있어 만둣국을 끓이기로 했다.

하루 전에 계란지단을 색깔별로 나눠 부치고 소고기 고명과 김도 구워 준비했다.

언덕 위 아파트에 사는 봉사요원 한 사람을 태우러 갔다. 함께 당번이 된 단짝 집사님이 조수석에 앉아 지난 며칠간의 안부를 묻는다.

이름과 생김새만 다를 뿐, 그이도 나도 누구네 아내이며 어미이고 며느리이다. 더구나 명절이면 겪어야 하는 일상이 같기에 나눌 얘깃거리도 거의 비슷하다.

교회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사골국물 녹이고 간을 했다. 워낙에 진하게 우러나서 기본양념만 하면 되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맛나게 드시는 입모양만 봐도 흡족하다.

어느 영화에서 봤던가. 레시피는 책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의 마음에 있다고.

맛있고 행복하게 먹어 줄 입들 떠올리며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손이 큰 탓일까. 양 조절을 잘 못해서인지 솥 안에 터진 만두와 떡들이 꽤 남았다. 목사님 댁 흰둥이강아지 아름이의 밥으로 챙겨주고도 한 냄비쯤 된다.

음식물쓰레기통에 처리하려는 것을 만류하고 내가 담아왔다.

불어터진 떡국 맛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꼭 허름하거나 못살던 시절 소박한 음식위에는 할머니가 겹친다.

울 할머니 돌아가신지 해를 넘겼건만, 계절마다 정 깊은 먹을거리로 할머니가 다시 살아온다.

콧물 훌쩍이며 겨우내 동네 아이들과 고향들판을 뛰어다녔다. 짧은 겨울해가 넘어갈 무렵이면 시장기가 몰려와 헐레벌떡 집으로 들어온다. 씹지도 않고 삼키듯 저녁밥을 해치웠다. 엿가락마냥 하루의 길이가 늘어났는지 밤의 한 중간이 되면 늘 출출해진다.

마땅한 먹을거리가 부족하던 시절.

할머니는 겨울동안 부엌대신으로 정해진 윗방으로 올라가 낮에 먹다 남은 떡국양푼을 들고 오셨다.

허옇게 죽은 잿더미 뒤집어 화로 안에 남겨진 불씨를 모아 입김으로 분다.

식어버린 쌀떡 양푼을 올려놓고 주걱으로 휘젓는데, 마른침 삼키고 앉았던 나는 채 데워지기도 전에 숟가락질을 해댔다.

그야말로 퉁퉁 불어터진 떡국이 뭔 맛이 있었을까. 국물은 거의 졸아붙고 터진 만두에서 나온 김치속이 지저분하게 섞여진 모양새다. 떡들끼리도 덩어리로 뭉쳐있어 한 숟가락 뜨려면 주먹만 한 크기였다. 

 

교회 온돌방에서 후루룩 맛있게 떡국을 드시는 할머니들 향해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게 그 유명한 여주 쌀떡이예요. 불어터져도 쫄깃한 맛이랍니다!”


점심나절 집에 돌아와 비닐 팩에 옮겨 담아온 떡국을 냄비에 쏟아 붓는데 할머니 생각에 군침이 돈다.

저녁 배터지게 먹었건만 이슥하게 밤이 깊어진 지금, 퉁퉁 불은 떡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불어터진 떡국을 먹어본 적이 있는가.

흐물흐물 풀죽만 같은데도 내게는 별미였다. 눌러 붙지 않게 화롯불에서 미지근할 정도로만 데워주던 것은 할머니의 온도였다.

삼남매가 제비새끼 입 벌리듯 모여들면, 행여 한 놈 입에라도 부족할까 고루 퍼주던 사랑이다. 별 양념도, 온갖 고명도 없던 허여멀겋게 퉁퉁 불어터진 떡국이 주는 포만감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무게였다.


나는 지금, 곁에 앉아 인터넷삼매경에 빠져있는 딸아이를 꼬여낼 작정이다.

혼자 먹는 맛은 재미가 없다. 한 양푼에 담아 각자의 숟가락으로 퍼먹어야 제 맛이다.

일전에 먹어보더니 딸아이도 어미 닮았는지 불어터진 맛을 좋아한다. 떡볶이도 불어야 더 맛있다하니 모전여전이 아닌가.

헌데, 요것이 다이어트 어쩌고 하며 눈을 가자미처럼 찢어지게 째려 볼 텐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에라! 나 혼자라도 퍼 먹을 거다.

할머니 사랑이 휭하니 빠져나간 자리를 불어터진 떡국으로 채워볼까 한다.

절대 출출해서가 아니다.

 

근데, 남편 눈치가 보이고 자꾸 웃음이 난다.



 

2013년 2월 15일

떡국위에 할머니를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