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간둥이
서울근교에 사는 남동생이 초등학교 때 은사님을 만나러 간단다. 사전에 듣기로는 누나뻘인 내 동창생들도 몇몇 나온다고 했다. 먼 바닷가에 산다는 이유로 가지 못하고, 동생에게 안부만 여쭤 달라 전했다.
손가락을 꼽아보니 34년만이다.
6학년이었던 그 때, 선생님은 옆 반 담임이셨다. 사실 학교에서보다 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더 자주 뵙던 분이다.
노래가사에도 나오던 ‘총각선생님’이었다. 친구들과 기차역전 근처 총각선생님의 자취방을 드나들며 꽤나 설레고 두근거리던 시절이다. 과자봉지를 들고 가거나 빨랫감 속에서 양말만 꺼내 비벼 헹궈 널어놓곤 했다.
역사적인 상봉의 자리에 참석하지는 못했으나, 궁금함을 감출수가 없었다. 동생을 채근하여 휴대전화 문자로 물었다.
“선생님이 뭐라셔? 날 기억하시니?”
“어.., 내가 누나동생이라고 이름 대니까 금방 그러시더라. 아하.., 그 재간둥이!”
인터넷 가족카페에 선생님과 같이 찍은 사진을 올려놓았다하여 들여다봤다.
아! 어쩜 모습이 예전그대로일까. 머리에 흰 눈만 내렸을 뿐, 환한 미소와 이목구비가 총각선생님이던 시간으로 멈춰있다. 현재 인천 어느 초등학교에서 재직 중이고, 교회장로님이 되셨단다.
사진을 들여다보며 머릿속은 재빠르게 34년 전으로 달려가고 있다.
성탄절이면 교회에서 성극준비를 했었다. 언제나 그 선생님이 담당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뮤지컬 한 편이었다. 당시엔 노래극이라 했는데, 6학년아이들을 중심으로 연습에 임했던 기억이 난다.
자랑 같아서 직접 말하기 겸연쩍지만, 재주 많았던 내가 가만있을 리 없다. 꽤나 열정적으로 임했다.
학교에서도 나는 대단한 아이였다. 특기가 한 가지에만 국한되지 않고 골고루 갖춰있었다.
글짓기대회, 과학 실기대회, 미술대회, 웅변대회, 고전무용, 연극....등등. 교내뿐만 아니라 지방대회에 나가서도 수상하여 학교이름을 높여주곤 했다. 공부도 항상 1,2등을 맡아 놓고 했다.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부반장을 6년 내내 해먹었다. 요즘말로 리더십이 좋다고 하던가.
40년의 세월이 흘렀다한들, 한참 잘나갔던 제자이름을 총각선생님이 잊으셨을 리가 없다. 다른 표현도 아니고 ‘재간둥이’로 떠올렸다는 동생의 말에 한참을 웃었다.
오호 통재로다!
그 빼어났던 재간둥이는 어데 가고 오늘날 푹 퍼진 동네 아낙의 모습이 되었단 말이냐.
엊그제 딸아이가 이박삼일 교회수련회 다녀오는 길에 인쇄지 한 장을 내민다.
‘다중지능검사’라는 제목이 걸려있는 검사지다. 언어, 신체운동, 음악, 논리수학, 인간친화, 자연 등등...., 여러 분야에서 자신의 특기를 알아보는 테스트용지다. 자기는 음악지능부분만 높게 나왔고, 하물며 체육은 숫자 0이라며 키득키득 웃는다.
심심하던 차에 나도 체크를 해봤다. 딸에게 최종 결과를 추려달라고 했더니 정리하다가 놀라며 한마디 한다.
“우와! 엄만 뭐이래? 운동부분만 약간 낮게 나오고, 다 좋은 걸로 나왔네!”
“당연하지! 난 뭐든 잘하는 재간둥이였거든. 니네 엄마가 그런 사람이야! 알어?”
총각선생님 말이 생각나 큰소리 뻥뻥 치며 호탕하게 웃었지만, 곧 허전함이 밀려왔다.
과거에 내가 그런 아이였다니, 며칠 동안 스스로도 굉장히 놀라고 있는 중이다.
사진으로나마 선생님을 뵙던 밤, 잠자리에 누웠는데 자꾸 실실 웃음이 나온다.
드라마에 나오는 기억상실증 주인공이 오래 잊었던 제 이름을 찾은 기분이다.
재간둥이라!
하긴, 아직도 내 본능엔 그런 끼가 남아있어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타오르곤 한다.
꿈쩍도 않는 교회 선교회아줌마들 모아놓고 연극 좀 해보자며 들쑤신다. 게시판 환경 꾸미거나 글씨 장식을 하는 일에도 겁 없이 덤빈다. 어디 그뿐이랴. 타령 한 곡 늘어지게 불러보고, 우리가락이 흘러나오면 춤사위를 떠올리기도 한다.
오십이 코앞인 나이에 문득 ‘재간둥이’라고 기억해주신 선생님 덕분에 산뜻한 기운이 된다.
재간둥이! 참 귀엽고 생기발랄한 이름이다.
알고 계시라. 왕년에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아니, 지금도 재간 있는 사람인 게 분명하다고,
감히 허풍한번 떨어본다.
2013년 1월 24일
재간둥이로 기억해주신 총각선생님(?)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