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불러주세요!
갈수록 희미해지는 기억력을 되살리고자 새해부터 시작한 일이 있다.
계획이라 말하니 거창한 것인가 하겠지만, 휴대전화 속 저장된 전화번호 외우기부터 실천에 옮겼다.
사람 사는 일에 편리함을 더해주고자 이용하는 기계지만, 어느 순간 그것들에게 이용당하거나 지배받고 있다는 불쾌감(?)을 지울 수가 없다.
명색이 만물의 영장인데 위에 군림하지는 못할망정 구속당해야 되겠는가.
해서 당장 전화목록의 지인들 번호를 외우는 연습에 돌입했다.
단축키나 검색을 하면 쉽게 찾아진다는 것, 일찍이 알고 있었으며 경험했던 일이다.
예전 유선전화기만 있던 시절, 나는 곧잘 꽤 여러 명의 전화번호를 외우곤 하였다.
유치원에 근무할 당시 원장님은 떠오르지 않는다고 툭하면 사람이나, 상호먼저 읊으며 번호를 물어왔다. 머릿속 회전판을 더듬기도 전에 입에서 번호가 술술 나온다. 어쩜 그렇게 많은 번호를 틀리지도 않고 잘 외우냐며, 할머니원장님이 손뼉을 치며 깔깔 웃었다.
그랬던 내가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도록 멍청해졌다는 사실을 어찌 세월과 나이 탓으로만 돌려야 하는가.
지혜와 총기를 완벽하게 되살릴 수 없다면, 언저리쯤으로라도 회복해야겠다는 자존심이다.
전화번호 외우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다. 머리보다 손가락이 먼저 익숙해져 버튼을 더듬고 있다. 상대에게 전화 걸 일이 생기면 일부러 눈부터 감기로 했다. 숫자 하나씩 떠올려 보는 거다.
답답한 점도 있지만 아날로그가 주는 훈훈함이 되살아나서 좋다. 짧고 신속하게 만나지는 거리보다 더듬더듬 숫자를 기억해내며 상대와 연결되어가는 설렘도 생겨준다.
아침운동을 다녀오는 골목길.
찬 기온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겨울 햇살을 나눠가지겠다고 견공들이 사방에 퍼드러져 누워있다. 어느 녀석은 벌써 꾸벅이며 졸기도 한다.
빌라들이 즐비한 언덕 하나를 내려와 내 집 근처에 다다르면, 눈에 익은 한 떼의 개들이 꼬리 흔들며 달려온다. 뼈다귀 한번 건넨 적이 없는데도 멀찌감치 걷는 나를 알아본다.
그네들이 나를 아군으로 인정한 시간분량은 절대 촌각이 아니다. 오랜 시간 숱한 반복학습의 결과이다.
집집마다 개 한 마리씩은 키운다. 저마다 이름이 있는데 그걸 기억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헌데 나는 볼 때마다 녀석들의 이름을 불러줬다.
마트에 다녀오던 길에 한 녀석 마주치면, 마치 사람을 대하는 양 말을 걸었다.
“너 이름이 뭐니?”
마치 가수 양희은이 그랬다던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물어보다가 혼자 실실 웃기도 한다.
내 꼴이 하도 웃겨서 말이다. 누군가 보면 얼마나 외로웠으면 개 이름 궁금해 하며 묻는가 싶을 거다.
뭔 명령어인지 몰라 멀거니 서 있는 견공을 쳐다보면 더 웃게 된다.
하여간 그리하여 적어도 우리 집 가까운 순서대로 꽤 여러 마리의 개 이름을 외우게 되었다.
아들의 통학버스 배웅하러 나가는 아침길이면 반갑게 달려드는 녀석들.
전부 제 이름부터 불러달라는 눈치다.
“어...., 그래! 루비야 안녕? 코코도 잘 잤니? 호돌아 너도 이리 와봐라! 인사해야지.”
언제나 젤 앞에서 맞이하는 세 녀석부터 아는 체를 한다.
“달마야! 넌 좀 징그럽다. 옆에 오지마라! 두두 넌 어디 갔다 왔니?”
거의 매일 보는 명단 외에 ‘초롱이, 해피’는 멀리서 마실 오기 때문에 가끔 본다.
최근엔 이름을 알 수 없는 백구 한 마리가 내 외투 잡아끌거나 일어서서 앞발을 덥석 내미는 바람에 옷에 흙이 묻기도 한다.
그 녀석 이름은 도대체 뭔지 알아내지 못했다.
이번에도 특유의 양희은 목소리로 ‘너 이름이 뭐니?’ 몇 번을 물어보지만 철퍼덕 거리기만 한다.
우리 집 견우 말고도 골목길 구성원들이 나를 적극 반기는 이유는 다 한가지다.
제 이름을 기억하고 다정하게 불러주는 사람이라는 것.
개들도 그러할진대 이름 석 자 알아주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새해 첫날 시댁엘 갔다. 시어른들 모시고 김포 사는 막내시동생 개업한 식당도 가볼 겸 나선 길이었다.
하남 사는 시누이 가족도 동행을 하게 되어 대가족이 되었다. 신혼 초부터 그랬듯이 시부모님이 동서와 내 이름을 부른다. 시누이나 시동생과 같은 음높이다.
“얘! ㅇㅇ야, 이리 와 봐라.” 막내동서를 딸처럼 부르는 시아버지.
다음날 시댁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는데 같은 방 침대 쪽에 누워있던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전화통화를 한다.
방바닥에서 아들과 뒹굴 거리는데, 귓가에 내 이름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하자. 나랑 ㅇㅇ랑 버스타고 가면 되지 뭐!”
고부지간과 시누이 함께 끼어 셋이 쇼핑가자는 약속을 정하는가보다.
누구의 엄마로, 어떤 남자의 안 사람으로 더 많이 정해졌던 이름이다.
나 자신조차 불러보면 입모양부터 어색해지는 내 이름 박예천.
시댁에서 누리는 호명의 기쁨을 친정어머니께 전하며 올케들과 나누기로 했다.
당장 전화를 걸어 엄마에게 차근차근 당부한다.
“엄마! 동생 댁 둘 한테 이왕이면 이름 불러줘! 나보다 더 자주 보게 될 딸들이잖어. 그치?”
맘 착한 울 엄마는 맏딸인 내 말을 특히 잘 들어주신다.
엄마 덕에 여동생이 둘이나 생기는 셈이다.
이쪽저쪽 시댁과 친정 오가며 나는 요지부동의 딸의 이름을 얻는다.
되도록 만나는 사람마다 이름 석 자 불러주는 연습도 전화번호 외우는 것만큼 열심히 할 작정이다.
실습삼아 요즘 집에서 열심히 소리치고 있다.
방학을 맞이하여 하루 세끼 굳세게 마누라 밥 얻어먹는 우리 집 삼식이 남편이름 부터다.
일용할 양식 황송하게 차려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할 판에 감히 식후 커피주문을 하다니.
해서 내가 남편에게 쏘아댔다.
“야! 전ㅇㅇ, 네가 좀 타서 마누라 주면 안 되겠니?”
시엄니 보시면 호통 칠 장면이지만, 한 살 나이차에 생일간격은 겨우 6개월이니 맘먹어도 되지 않을까? 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가수 혜은이의 노래가사에도 나오는 말이다.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거기 서있을 게요!’
사랑하는 사람의 맘을 알아차리려면 이름부터 불러줘야 한다. 그래야 만나진 못하지만 제자리에 서 있기라도 할 거란다.
사랑하는 사람들 곳곳에 잡아두기 위해 나는 이름을 부를 거다.
세월 흘러 내 기억력이 다하여 쇠잔해지는 날이 되면, 그들이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까.
아! 냉각의 계절에도 이토록 따스한 오후가 있구나.
저것의 이름이 뭐였더라?
‘햇살’....., 해살아! 고맙다.
내 아들 전유뽕이 맞으러 나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