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행복한 사람
지난 봄부터였을까.
무시로 그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어느 초등학생이 집에 돌아와 음악실기 연습을 하는 것이라 짐작했다.
사방이 고즈넉한 분위기가 될 무렵이면 가늠할 수 없는 방향에서 피리소리가 들려온다.
길 건너편 빌라 몇 층쯤인지, 옆집에 사는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알아낼 재간이 없었다.
귀에 익은 악보 몇 타래가 연이어 흘러나온다.
아이의 실력이 아닌 게 분명하다.
어느 날은 흘러간 가요 여러 곡이 감나무 사이에 올라앉거나, 그도 아닌 오후엔 여고시절 음악시간에나 불러봤을 가곡이 담벼락 틈새로 새어들었다.
한가한 오전시간 마당에 나섰다가 잡초 뽑는 척 쪼그려 앉아 누군가 연주하는 음률을 홀로 관객이 되어 감상하곤 하였다.
점점 피리소리주인공에 대한 추측을 해보기에 이르렀다.
방랑자 김삿갓 닮은 어느 사내가 호젓한 기운에 휩싸여 피리를 불고 있는 것일까.
한 깊은 여인이 가슴속 응어리나마 삭히고자 피리소리에 제 심신을 기대고 있을까.
갖가지 상상으로 나의 머릿속에서는 날마다 피리의 주인역할이 바뀌고 있었다.
한 계절이 다 접히도록 피리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아침이든 한 낮이든, 일몰 즈음에도 간혹 이어졌다.
텃밭이며 옥상에 심겨진 푸성귀가 초록으로 무성해지던 여름날이 되었어도 노랫소리는 계속되었다. 점점 길어진 저녁 햇살 끝자락쯤에 가느다랗게 매달려 음을 고르곤 하였다.
하지로 접어들며 여름햇살은 더욱 길게 엿가락처럼 늘어지고 있었다.
저녁 무렵, 땀에 젖은 남편이 퇴근하며 옆집 뒤란을 흘긋 보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저 할머니 오늘도 또 피리부네. 기분 우울해질텐데......”
그제야 피리의 주인공을 알게 되었다. 바로 옆집에 사는 시인의 아내였다.
교사로 재직하다 몇 해 전 정년퇴임한 할머니다. 남편은 ‘설악의 시인’으로 꽤 알려진 분이란다. 시인이 작고한지는 십여 년이 훨씬 넘는다.
얼마 전부터 피리소리는 딱 두 가지 곡만 반복되고 있다. 익히 알려진 가요 ‘칠갑산’과 가수 이문세가 부른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노래다.
금화정 콩밭에 엎드려 하루 종일 풀을 뽑다 돌아온 저녁이면 솜뭉치가 된 몸으로 칠갑산을 듣는다.
콩밭 매는 아낙네가 마치 내 자신인양 멜로디를 따라 부르게 되는 거다.
베적삼이 흠뻑 젖도록 열심을 내지도 않았고, 홀어머니 두고 시집 온 것은 더더욱 아닌데도 애절한 음색에 나도 모르게 처연해진다.
‘칠갑산’ 연주가 어느 정도 본인 맘에 흡족하였는지, 다시 매일 밤 이어지는 곡이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유년시절, 깊은 밤 장난으로라도 피리를 집어 들면 부모님께 혼쭐이 났던 기억이 있다. 밤엔 그런 거 불면 안 된다고.
시인의 아내는 어린 날의 꾸지람을 까맣게 잊은 것인지 밤이면 늘어지게 피리를 분다.
저녁상을 물리고 가족끼리 둘러앉은 우리가족 거실로 넘실넘실 시인의 아내가 부는 몇 분 음표 가득한 ‘행복한 사람’이 간드러지게 창문을 넘는다.
굵직한 퉁소도 아니고, 묵직한 대금소리와도 비슷하지 않은 여린 풀피리의 음 깊이다.
한 곡이 무사히 흘러간 적이 드물다. 항상 막히는 부분이 정해져있다.
특히나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 이 곡조가 애를 먹이는 모양이다. ‘나는 정말.....,’ 여기서는 꽤 오래 되돌이표를 붙인다.
노래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어느 순간 나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다가도 흥얼흥얼 따라하게 된다.
주체 못할 감정이 표현되는가.
제법 목소리가 커질 기미가 보이면, 남편에게 퉁바리를 맞는다. 옆집 할머니가 다 듣겠다고.
연습에 열중하는 연주가에게 있어 내 노랫소리는 잡음이며 방해요인이 되긴 하겠다.
그래도 그렇지. 한 곡을 매끈하게 넘어가면 좋으련만, 듣고 있는 내 가슴이 오히려 애가 마른다.
하필이면 곡의 주제가 되는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 여기서 헐떡거려야 되는가 말이다.
장마의 한 중간인 오늘밤.
엷은 빛깔 조명을 밝힌 격자무늬 시인의 아내 집에서 행복한 사람 그 노래는 또 흘러나온다.
한바탕 천둥번개가 흙바닥을 뒤집고 난 후에 찾아온 고요 속으로 피리소리가 휘적거리며 헤엄치고 있다.
처절하게조차 들리는 저 ‘행복한 사람’의 외침이 오늘따라 가슴을 찢으며 스며온다.
저 여인은 누굴 보고 행복한 사람이라며 고장 난 녹음기처럼 되씹는 것일까.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두고 훌쩍 떠나버린 남편, ‘바로 당신이 행복한 사람이오!’라는 절규인지, 너른 마당 둘러치고 붉은 기와지붕 높다란 큰 집에 청상과부로 홀로 남은 자신에게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위하는 것인지 뒷목이 쩌릿하도록 들려온다.
지긋지긋한 세상을 등지고 훨훨 날아간 시인에게 보내는 메시지 같기도 하고, 맘껏 누려보는 자신만의 자유로운 시간을 넉넉하게 행복하다고 부르짖는 노래로도 여겨졌다.
얼마나 더 호흡 가다듬고 연습을 해야 시인의 아내는 정말 행복한사람이 될 수 있을지.
2012년 7월 13일
추적거리며 비 뿌리는 밤, 시인의 아내는 피리를 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