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집적, 우 껄렁
굳은살 앉았던 오른손 집게손가락과 장지가 말랑말랑해졌다.
당연한 결과다. 해를 넘기도록 가야금 줄 건드려본 기억이 아득하지 않은가.
손목이 부러졌다고 두어 달, 이사하느라 바쁘다며 몇 달.
핑계 김에 쉬어간다지만 정도가 심하다.
어젯밤은 큰맘 먹고 피아노 옆에 기대 놓았던 가야금을 끌어안았다.
내 키보다 높은 것을 질질 끌어다 거실 중앙에 내려놓고 들여다보니 한숨이 절로난다.
뽀얀 먼지도 그렇거니와 느슨하게 늘어진 열두 줄이 주인여자를 원망하다 지쳐버린 자세다.
음 고르느라 쉬운 곡 먼저 퉁겨보니 습한 기온에 소리가 늘어지며 쳐진다.
게으르고 불성실했던 값을 제대로 치르는 중이다.
주인남자는 밤낚시에서 눈먼 고기 좀 건져보겠다며 나가고, 딸아이도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은 흰둥이 강아지와 장난치느라 방에서 나올 생각이 없다.
오롯이 내시간이다.
이런 날은 긴 아리랑이 제격이다.
곳곳에 가슴시린 사람들, 그립다 차마 말로 못하고 절절히 스러지는 이들을 위해 뜯어 주고픈 곡이다.
깊어갈 가을 밤, 늦은 중모리가 어설프게나마 제 멋에 겨워 내 속을 울린다.
애절하게 왼손가락들 세워 현을 떨어주니 잔잔한 여운이 더해진다.
다가 올 가을 한 폭을 나 혼자만 휘감고 도취되어 버린 듯 온갖 폼 잡아 본다.
허나, 한 곡을 매끈하게 완성하지 못하니 멋들어지게 잡았던 분위기가 박살나고 만다.
오죽이나 가야금을 등한시했으면 그 꼴일까.
애초에 여러 사람들에게 배우러 다닌다는 소문이나 내지 말걸.
가야금 끌어안은 채 똥폼 잡던 그 밤이 지나고 다음날 오후다.
동해안에 상륙한 태풍기운이 비바람을 흩뿌린다.
아들의 피아노 학원에 차 한 잔 얻어 마시러 올라갔다.
얼마 전부터 놓여있던 장구를 누군가 장단 맞춰 두들기는지 소리가 문밖까지 새어나온다.
절로 어깨춤 덩실거리고 싶을 박자이며 흥에 겹다.
잘 아는 교회 남자집사님 솜씨였다. 올해 회갑연세 되는데, 피아노 배워보겠다고 오신 거다.
귀에 익은 장단이 들리기에 입안에서 흥얼거리던 민요자락을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펼쳐진 꼴불견이다. 거기서 멈췄으면 좋았으리.
“집사님! 중모리 좀 쳐주세요! 최대한 천천히요.”
분명 속으로 별스런 여자라 욕했을지도 모른다.
학원생들이 오가며 지켜보는데도 부끄러움 감춘 채 아는 민요 몇 곡을 불렀다.
쑥스러운 듯 웃자, 저만치 장구를 밀어놓으며 그 할아버지 한 말씀 남긴다.
“가만 보면, 박 집사님은 재주가 참 많아요. 이것저것 못하는 게 없어! 근데 말이야. 온전히 한 가지를 제대로 하는 것은 없는 거 같애. 그쵸?”
아! 정곡을 찌르는 일침에 나는 구석으로 머리 처박고 싶었다.
할배집사님 말씀이 전부 맞다.
여태껏 좌우로 힐끗 눈요기하고 찔러대며 맛보기만 했다.
뭔 욕심이 그리도 많았는지 남 하는 것은 죄다 손대고 싶었으니.
진득하니 끝을 본 것도 없으면서 잡다하게 벌려놓은 상태로 우선멈춤 상태가 되어버리고.
어릴 적부터 그랬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던가. 재능도 없으면서 손부터 내밀고 무조건 다가섰다.
고전무용이니 글쓰기도 어찌 보면 가당치 않은 욕심이었는지 모른다.
나풀거리는 한복을 차려입고 버선발로 내딛는 걸음이 부러워 어린나이지만 덥석 끼어들었다.
그 덕분인지 우리가락을 일찍 귀에 익혀 가야금도 저질러 버렸던 거다.
무엇하나 전문적인 분야에 몸담지 못하고 좌편 집적거리고, 우측으로 껄렁대며 살았다.
진즉에 한 우물을 팠더라면 중년부인 다 된 지금쯤 뭐라도 되어있지 않았을까.
얄팍한 앎에 만족하며 다 가진 양, 깊이 아는 양 여전히 나는 기웃거리고 산다.
변명삼아 말하노라면, 깊이는 없으나 수박겉핥기식 대충 얻어 익힌 분량으로 아는 척은 곧잘 한다.
사람들은 속고 있다.
가려진 껍데기를 걷어내면 내가 얼마나 부실한 인간인지 모른 채 말이다.
여전히 두 눈 번뜩이며 허망한 욕심을 내고 있다.
가야금 한 곡 완전히 소화해내지 못하는 주제에 배워볼 게 없나 두리번거린다.
좌 집적, 우 껄렁 하는 내 병은 영원한 불치병이다.
2010년 9월 2일
깊이 없는 나를 들여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