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임산부 배려석에 임산부 여부를 감지하는 센서 설치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025

아주머니께


BY 박예천 2010-08-14

        

           아주머니께!

 

 

 

<미안합니다!>

고백하건대, 뒤에서 아주머니 욕을 엄청나게 했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 정도로 지독한 삶을 지탱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꿈에 그리던 마당 있는 주택 들어서며 솔직히 집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처음 아주머니와 만났던 그 겨울날을 기억합니다.

거실바닥은 얼음장만큼이나 차갑고 발이 시렸지요. 겨우 슬리퍼를 신어야 버틸 수 있었습니다.

집 구경 온 손님 대접하겠다며 닫아두었던 부엌문을 열고 사과와 차 한 잔 준비하셨습니다.

싸하게 얼었던 찬 기운이 거실로 새어나왔습니다.

역시 주방 바닥도 보일러를 켜지 않았는지 구석에 작은 히터가 있었어요.

아들 둘을 훌륭히 공부시켰다고 집터가 아주 좋다며 자랑삼아 말씀하셨습니다.

카이스트에 간 아들들 뒷바라지 하느라 아끼고 줄이며 살았노라고.

과연 공부 잘 했다는 아드님들의 방은 구석에 달랑 책상과 침대뿐이었지요.

스탠드도 없이 형광등을 책상 앞으로 길게 전깃줄 늘여 달고 겨우 방의 형태만 유지된 모습이었습니다.

화장실 바닥의 타일들도 전부 깨져 굴러다녔고 북쪽 방엔 곰팡이까지 피어있었습니다.

알뜰한 것도 정도가 있지 저건 사는 게 아니라고, 집 계약 하고 돌아오면서 남편과 혀를 끌끌 찼답니다.

 

이사 와서 보니 마당이며 집 주변마다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봄이 시작되고 햇살의 깊이가 넉넉해질 즈음, 꾸며놓은 텃밭에 심지도 않은 여러 싹들이 마구 올라오더군요.

어쩌면 이토록 가꾸지도 않고 정신없이 살았느냐고 이름 모를 푸성귀가 올라 올 때마다 아주머니 흉을 거하게 봤답니다.

아주머니가 지난 이십여 년 안주하던 집에서 이제 오 개월 정도 살아봤습니다.

저의 잣대로 판단하고 독종아주머니라 욕했던 점들을 사죄드립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봄내 감나무 밑에서는 고물고물 비슷한 떡잎을 매달고 연두 잎들이 올라오더군요.

말끔히 정리하는 차원에서 갈아엎을까 했지만, 무슨 싹일지 지켜보자 했습니다.

여름으로 접어들자 감자 잎이 나오기 시작했고, 잘 여문 햇감자 맛을 보게 되었지요.

처마 밑에 줄 맞춰 심어놓은 부추와 미나리도 그랬습니다.

입이 심심하면 부추전과 미나리초무침을 해 먹었어요.

아주머니가 두고 간 뿌리와 씨앗들은 변함없이 제 역할 충실하며 새로운 주인에게도 맘을 열어주더군요.

그래서 맛난 식탁을 꾸밀 수 있었습니다.

 

어제 낮.

키 높이 자란 들깨 한 아름 베어온 남편이 밭을 정리하겠다며 다듬으라고 건네더군요.

넓은 것들 깻잎김치로 윗부분은 깻잎 순 나물을 하겠다며 손톱 끝에 풀물 들이는데,

아주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이미 감자를 캐먹은 자리에선 두 번째 단 호박 줄기가 힘차게 뻗어나고 있는 지금.

담장 앞에 방울토마토 여러 그루, 모서리 쪽에도 수박잎사귀가 펄럭이고 있는 걸 봅니다.

전부 심지도 않은 것들인데 예고 없이 땅에서 솟아나 주인부부를 놀라게 합니다.

환영이벤트라도 하듯 이 여름이 다 저물도록 뭔가 베풀고 있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따지고 보면 참나물, 취나물, 돌나물 온갖 꽃들도 빈궁한 제 삶을 풍요롭게 했지요.

튼실한 과일나무 세 그루도 있네요.

초록그늘 드리워주더니 실하게 달린 살구열매로 엑기스 담그고 장아찌도 해먹었습니다.

이웃에게 퍼 돌리고 남을 정도였습니다. 가을이면 감들이 탐스럽게 매달리겠지요.

이사 갈 때 다 거두어 가지 않고, 뿌리나마 남겨주셨기에 누려본 호사였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잘 살겠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아주머니처럼 살 자신이 없습니다.

크게 사치스러운 소비성향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그 정도의 생활은 제가 감당할 무게가 못 됩니다.

우선 적당히 게으르고 현실적이지 못한 사고를 지녔기에 더욱 그러하지요.

옭아매고 조이는 것을 잘 못합니다. 그러다간 제 숨통이 먼저 막혀버릴 것만 같거든요.

태생이 그러하니 시도해보기도 전에 덜컥 겁부터 난답니다.

야무진 구석 눈 씻고 찾아봐도 없도록 물러터지니, 악착을 떨어대는 삶인들 견뎌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나는 것은, 두 아드님을 잘 키워냈다는 그것입니다.

요행을 바란다고 할까요?

어쩐지 이 집터에 살기만 해도 행운이 찾아올 것만 같습니다.

아주머니의 쫀득한 기운이 벽돌 틈마다, 마당 곳곳 나뭇등걸에도 매끈하게 스며있으리라 믿고 싶어진답니다.

하여, 절약정신 투철했던 아주머니 발뒤꿈치 흉내만 내어도 술술 잘 풀릴 것이라 생각되니 어쩌지요?

맘먹은 대로 만사형통하리라 믿으며 잘 살겠습니다.

최선의 자세로 임하며 정말 잘 살아보겠습니다!

저녁식탁에 올렸던 깻잎 순 볶은 것이 참 감칠맛 나게 입맛을 돋우더군요.

 

아참! 궁금한 게 한 가지 있는데요.

열두 살 나이 먹도록 어눌하고 생각 깊지 못한 저의 아들 녀석도,

이 마당 안에서라면 여물어 갈 수 있을까요?

카이스트는 아니어도 좋답니다.

사람구실 할 수 있을지 그냥 여쭤보는 겁니다.

 

태풍 끝인지 바람 섞인 빗방울들이 감나무 잎사귀를 휘감네요.

옆 사람, 앞에 산 사람들, 뒤를 달려오는 사람들도 전부 행복했으면 합니다.

아주머니 살다 간 이 마당 있는 집에서 말이지요.

 

2010년 8월 14일

깻잎 다듬다가 아주머니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