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칠우쟁론기(廚房七友爭論記)
아차! 설거지통에 집어넣은 사실을 잊었구나.
수세미에 거품 풀고 그릇하나를 닦으려는 순간, 왼손 무명지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예리한 금속이 살갗을 스쳤다고 채 알아차리기도 전 일어난 상황이다.
“너는 어찌하여 음식재료 써는 일에는 뭉툭하더니 내 살 벨 때만 날을 세우느냐! 이참에 새 칼로 바꿔야겠네.”
지혈삼아 손가락 움켜쥐고 통증 참으며 혼잣말해본다.
잘 들지 않는 칼 때문인지 손목에 힘이 들어가던 요즘이었다.
칼질 후 따로 씻어 놓곤 하였는데 그릇들 속에 넣고 말았다. 부쩍 심해진 건망증이 또 말썽이다.
화딱지가 나서 부엌칼을 저만치 밀어놓았더니 독기품고 째려본다.
서쪽으로 기울던 저녁햇빛 한 칼날이 반사되어 움찔 소름 돋도록 광선을 내 쏜다.
어떠한 사건이든 쌍방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며 꽤 할 말이 많은 모양이다.
흐르던 피가 멎었기에 대충 일회용밴드를 붙이려고 식탁의자에 철퍼덕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의기양양 칼의 수다가 이어진다.
1
이것보세요, 주인마님!
칼 없는 주방을 상상이나 해보셨나요?
무사의 손에 들리면 사람 죽이는 흉기지만, 요리사 칼은 훌륭한 음식을 만드는 도구입니다.
자르고 다지기만 하는 저라고 속까지 냉혈인줄 아십니까? 조화로운 분리야 말로 또 다른 창조물을 이루기 위한 필요순서랍니다.
제목에 맞는 모양을 내기 위해 얼마나 심사숙고 하여 각도조절을 하는지 모릅니다. 미세한 착오라도 있는 경우 오늘처럼 피를 보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주인마님의 손 맵시에 빌붙어 아무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고철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제가 없는 주방은 빛 좋은 개살구요, 뭐 없는 고쟁이라 할 수 있으니 함부로 무시하면 큰 코 다칩니다. 단 칼에 마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릴 수도 있다 이겁니다.
2
여보게, 칼 양반!
내 가만 듣고 있자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네 그려.
지금 자네 꼴은, 뭐 뀐 놈이 성낸다고 거의 협박수준이 아닌가.
날 세우고 공격만 일삼는 칼이라서 뭐든 싸안을 성품이 못되는 모양이군.
주인마님! 제 얘기도 좀 들어보세요.
칼만 있으면 뭐 합니까? 도마인 제가 있어야 제대로 구색을 갖추는 겁니다.
글에도 받침이 있어야 매끄러운 모양의 단어와 문장이 되지 않습니까.
아니, 허공에 대고 썰어댈 겁니까?
온몸 난도 질 당하는 고통 이 악물고 참아내지 않았다면 요리의 완성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요?
묵묵히 납작하게 등 깔고 엎드려 있으니 생각도 없는 줄 아는지, 칼의 오만함은 지켜보기 힘듭니다.
저야 말로 주방요리 창조의 일등공신이라고 감히 아뢰옵니다. 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소서!
3
칼과 도마가 옥신각신 하는 내용을 듣고 있자니, 그동안 주인마님의 고충이 어떠했을지 저절로 짐작이 되는구나.
입 닥쳐라! 감히 나 없이 너희 둘만 장단 맞추며 온 종일 난타공연을 한들 무슨 요리가 나오겠느냐.
칼과 도마사이에 내용물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 나, 식재료야 말로 주방요리에 근간이 되며 마침내 주제가 되느니라. 아니 그렇습니까? 주인마님!
뼈대 없이 주절거리는 말들에 현혹되지 마시고, 언제나 신선한 식재료를 대령할 것이니 시름 놓으시지요. 재료에 따라 음식의 맛도 달라지지 않습니까. 각종 채소나, 육류, 생선 등등 식재료야 말로 요리의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고 봅니다.
마땅히 제가 으뜸으로 인정받아 주방 최고의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4
하하하! 셋이 서로 잘났다, 옳다 게거품을 물어대는 꼴이 참으로 우습구나.
마님! 잘 생각을 하십시오. 귀가 얇아 흔들리다 보면 자칫 판단이 흐려지기 쉽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저들의 간교한 말을 담아 듣지 마십시오. 냉정하게 중심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저는 비록 무색, 무취, 무미의 이름으로 개성 없어 보이나 세상 모든 것을 모두 포용할 자신 있는 물입니다.
유명한 광고를 보신 적 있나요?
쌀이 부족하면 밀이 대신할 수 있습니다....., (중략) 물이 부족하면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물 밖에 없다지 않습니까? 그만큼 저의 가치는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을 정도입니다.
도구가 갖춰있고 재료가 싱싱해도 물이 없으면 뭔가를 시도해 볼 엄두도 못내는 것이 현실입니다. 인정하셔야 할 겁니다. 구구한 설명 늘어놓지 않겠습니다.
다만, 마님은 현명하시며 판단력 또한 뛰어나신 분임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는 것만 말씀 올리겠습니다.
5
잠자코 가스레인지 속에서 사색에 잠겨 있으려는데 바깥이 혼란스럽군요.
몇 마디 듣고 있다가 불 보듯 뻔 한 결말에 할 말 잃을 정도입니다.
요즘은 식재료를 물로 씻어 칼과 도마로만 손질하고 곧바로 생식한답니까?
주인마님!
한여름 폭염에도 흘러내리는 땀을 주체하지 못한 채 제 앞에 서계셨지요. 끓이지 않는 찌개가 어디 있으며, 데치지 않고 무쳐내는 나물은 있단 말입니까?
저는 언제나 사람들 사이를 녹여주고 섞이게 했습니다.
불같은 사랑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그토록 고귀한 사랑 앞에 왜 제 이름을 수식어로 붙이겠습니까. 그만큼 제가 소중한 존재라는 말이지요.
앞 다투어 교만을 일삼는 저들의 모습에 마님도 상심하셨겠지만, 힘내십시오!
은근히 데워 주는 것이 또한 제 역할이니 저들도 곧 융화되고 서로를 보듬을 겁니다.
어떻습니까? 겸손하기만한 저의 포용력이야말로 의당 주방에서 높임 받아야 할 것입니다.
6
쥔마님! 도저히 들어줄 수없는 무가치한 이야기들뿐이군요.
서로 자신을 세우기에만 급급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씻고, 썰고, 끓이기만 하면 훌륭한 요리가 되는 겁니까?
음식의 기본은 간이라며 우리네 어머니들 대대손손 시어머니로부터 집안 고유의 장맛을 지키기도 했습니다.
필요에 따라 사용해야하는 적절한 향신료나 소금, 설탕 같은 양념이 없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음식은 먹지 않고 모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맛! 이것이야말로 양념만이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이며 고유영역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가 없지요.
저, 양념을 기억하십시오.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겁니다.
7
마지막으로 저도 한 마디 하겠습니다!
다들 침 튀겨가며 헛소리 외치느라 수고 많았소.
재료 선별한 후 손질하여 씻고, 양념 넣어 끓이면 요리가 끝나는 겁니까?
손바닥에 들고 시식 할 건가요? 어울리는 그릇에 담겨져야 화룡점정 대미를 장식하게 됩니다.
주인마님, 알고 계시죠? 언제나 주인공이거나 제일 중요한 대상은 맨 끝에 등장하는 것.
하여 그릇인 저야말로 주방의 특별한 존재임을 저들에게 각인시켜주십시오.
<박씨부인의 변>
일곱 빛깔의 목소리들 잘 들었노라.
의견분분하게 서로를 견제하며 다투는 모습은 시간이 몇 백 년 흐르고 뒤바뀌어도 변함이 없구나.
각자 자신이 최고이고 으뜸이라며, 주인여자인 내게 판단을 해달라는 것인데.
보통 이런 경우 화합을 유도하여 평화롭게 결말 내려주는 것이 모양새가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허나 어쩐다지? 삼복더위에 부엌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진저리가 나는 것을.
공포하기를, 당장 오늘부터 주인 전씨아저씨께 모든 주방권을 일임하고자 한다.
열심히 듣기만하고 발 빼서 미안하다만 현명한 판단은 그 남자가 할 것이다.
그 양반 밥은 할 줄 알까?
니들이 고생이 많다! 흐흐흐.
(유독 더위를 못 견딥니다. 며칠 전부터 속이 울렁거리고 두통 심한 것이 제대로 더위먹었나봅니다. 정신이 늘어지고 몽롱한 날들이 연일 계속됩니다. 설거지하다 손을 베어 넋 놓고 앉아 있다가 써 봤네요. 잠시 더위 좀 잊어보려고 발칙한 상상을 해봅니다.ㅎㅎㅎ 저......., 이러고 삽니다.^^)
2010년 7월 29일
찌는 폭염에 얼빠진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