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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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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돈


BY 박예천 2009-11-30

 

               내 돈

 

 


시어머니는 차분하게 표정 가라앉히며 식탁의자 한쪽을 가리켰다.

“너, 거기 좀 앉아봐라!”

“네에? 저요?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옆에 남편도 서 있던 지라 재차 확인을 해야 했다. 뭔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일까.

짧은 순간 머릿속에서 회전판이 돌아가며 나의 최근 말실수나 행동거지를 더듬는다. 

떠오르는 게 없다.

마주앉은 내 앞으로 뭔가를 내미는 시어머니.

“이게 뭔데요?”

수표 여러 장과 만 원권 한 다발이다.

“얘야, 우선 미안하다! 꼭 이자까지 쳐서 천만 원을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겨우 원금뿐이지만 받아다오. 네가 아니었다면, 어디서 빚이라도 내고 꾸었겠지. 돈이 이것뿐이구나. 고마웠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그 돈 돌려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기에 더욱 놀랍기만 했다.

목울대가 울컥하는가 싶더니 눈물이 저절로 고인다.

“이걸 제가 어떻게 받아요. 혹시 이돈 받고 인연 끊자 하시는 건가요?”

슬슬 잔잔한 웃음까지 콧물 훌쩍이는 사이로 삐져나와 농담이라고 내민 말이다.

“맞어! 너 그 돈 먹고 떨어지라는 엄마 생각이지......하하하”

어머니와 내게 내밀 커피 물을 끓이던 남편이 곁에서 끼어들며 호탕하게 웃는다.


나를 아는 사람들, 특히 곁에 있는 이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물러 터졌다, 제 실속 못 챙긴다, 영악하지 못하다 등등. 이게 나다.

거기다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똑똑하지 못하기도 하다. 한마디로 멍청하다는 얘기다.

 

스물 몇 살쯤이었을까.

한동안 인형극에 매료되어 공연을 다닌 적이 있다. 가는 곳마다 반응이 좋았다. 알음알음으로 신청이 들어오기도 했다. 보조교사 한명과 철제 인형극 틀을 어깨에 메고 지방도시까지 다녔다. 대형교회의 어린이들 위주로 했지만 가끔 재정이 어려운 개척교회도 다녔다.

공연을 마치면 강사의 사례비조로 돈을 준다. 대단한 금액은 아니었으나 답례이고 하니 받았다. 교통비와 유지비도 감당해야 했으니까.

한번은 친구 남편이 목사로 있는 경북안동을 간적이 있다. 인형극을 하러 가보니 열악한 환경이다. 마침 아이를 낳은 친구는 분유 값조차 없을 정도로 근근한 살림이었다. 

돌아오는 길 사례비라며 내미는 오만 원. 차마 받을 수가 없었지만 친구의 자존심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일단 넣었다.

잠시 뒤, 기차역까지 배웅 나온 친구의 귓가에 작게 일러주었다.

“네 방 피아노 커버를 들춰봐. 그거 목사님 책이라도 사드려라 알았니?”

펄펄뛰며 손을 내젓는 친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스스로 잘했다며 며칠 뒤에 자랑삼아 둘째고모에게 그날 일을 늘어놓았다.

“어휴 맹추 같은 년! 어째 그리 실속을 못 챙기냐? 돈을 모아야지 함부로 주고 오니?”

한참이나 어리둥절했다. 정말 난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간인가. 별생각이 다 들었다.

세상을 살기엔 허술한 구조로 되어있구나 싶었다.

 

그 바보 같은 짓을 시집오자마자 또 저지른 거다.   

시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던 신혼은 늘 빠듯했다. 더구나 겉만 이층집이지 갚을 융자금과 이자에 허덕이는 생활이었다. 매달 남편의 월급은 술술 빠져나가고 오히려 마이너스통장 액수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수고하고 애써도 쌓이는 것 없고 빚만 늘어갔다. 턱없이 은행이자만 높아가서 생돈을 날려야 하는 현실이었다. 점점 어깨 쳐지는 남편이 안쓰러웠다. 한 집안의 장남이고 가장이라는 무게를 혼자 짊어지고 애면글면 숨차했다.

“이거면 은행 빚 다 갚을 수 있을까요? 제발 저축이라는 것 좀 하고 살아보자구요!”

친정 부모님과 형제들에게조차 숨겼던 나의 비상금을 남편 앞으로 내밀었다.

고락을 함께 해야 진정한 부부라는 단순한 생각이 내린 결론이었다.

살면서 극한 상황이 오게 되면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써보겠노라 모았던 돈이다.

동생 데리고 십 년 동안 공부시키면서 죽기 살기로 모은 내 돈이다.

이십대가 허무하게 사라져가는 것만 눈물겨워서 그거라도 남겨야했었다.


감격스럽게 바라보던 남편이 말했다.

“여보, 고마워! 내가 금방 당신이름으로 적금하나 들어줄게. 꼭 갚을 거야!”

개뿔! 갚기는 뭘 갚았는지. 적금? 웃기지마시라! 새로운 빚만 주렁주렁 늘어갔다.

둘째고모 말대로 이런 한심한 맹추 같은 년이 어디 또 있을까.

푸념삼아 지인들에게 그 얘기를 하노라면, 한결같은 말들이 쏟아진다.

“어머, 세상에! 그 돈을 왜 남편 줘? 미쳤어? 바보 아니야? ”

나는 바보가 맞다.

손해보고 빼앗기는 일에 더 익숙하니 바보 아니겠는가. 허허허.

 

돌고 돌아 까맣게 잊었던 내 돈이 돌아왔다.

공중분해 되어 훨훨 사라졌다고 여겼던 돈이다. 물론 은행에 넣어 두었다면 십여 년 세월에 데굴데굴 고물이 묻어 이자 꽤나 붙었겠지.

고물 다 털어내고 찰떡 알몸 원금이라도 건네주신다는 어머니.

내 돈이라서 받았다. 셈 흐리고 돈 욕심 없던 나였지만, 그 돈은 꼭 되받아야 한다.

옷 안사입고 반찬값 쪼개며 늘려갔던 내 돈이기에!

박봉 쪼개 모은 돈이 통장 속에서 숫자가 불어가는 기쁨을 아는가. 그것도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니 먹지 않아도 배불렀다. 그렇게 이십대를 쟁였다.


돈다발을 쳐다보던 딸아이가 묻는다.

“엄마! 그 돈으로 뭐 살 거야?”

남편도 덩달아 우스개 소리를 한다.

“여보! 나 반 만 주라. 낚시도구 사고, 카메라 사자 응?”

이런! 그저 집어 쓸 생각만 하다니.

내 돈이다. 참견마라! 이십대의 절절한 사랑과, 아픔이 꼬깃꼬깃 스민 내 돈이다.

한 푼도 줄 수 없다.

 

아! 왜 자꾸 지난 세월 겹겹이 포개지며 눈물만 나는 것이냐.

에라, 도장 들고 은행에나 가자.

이럴 땐 묻어두는 게 제격이다.






2009년 11월 마지막 날

내 돈에 묻은 이십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