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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 보약 달이는 남자


BY 박예천 2009-07-06

 

       보약 달이는 남자

 



병약한 아내와 생활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사는 내내 미안했다. 맑고 개운한 얼굴로 퇴근한 남편을 맞이한 일이 몇 번인가. 잔뜩 찌푸린 인상이거나 입가에 잦은 한숨을 내밀기 일쑤였다.

생긴 모양새는 통통하고 건강해 보이는 체구이건만 나는 늘 골골해왔다.

어려서 죽을 만큼 아팠던 병력이 있었고 간신히 치료가 되어 사람구실 하지만 여전히 빌빌거린다.

식물인간으로 평생 살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박차고 일어서긴 했다. 아이도 낳지 못할 것이라 했었다.

기적이었는지 의지였는지 아니면 의술이었는지 나는 끝내 이겨냈다. 두 아이의 엄마로 버텨오면서 이젠 옛일이 된 투병의 날들을 떠올리자면 고생한 가족들이 아른거린다.

부모님을 비롯해 특히 할머니의 기도와 간호는 극진했었다. 지금 내 현실은 숱한 이들의 정성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건강하지 못한 상태를 알면서도 남편은 나를 선택해주었다. 애기다루 듯 살살 보살피면서 견뎌주었다.

몸이 아픈 날 부려대는 온갖 짜증에도 맞장구를 쳐주지 않았다. 적당히 피해가며 비유를 맞추기만 했다. 그의 노고가 느껴질 때마다 오히려 수치심이 밀려왔다.

과연 아내자격이 있기는 할까.

 


(사진찍기 좋아하는 남편 작품...낡은 양철대문을 타고 오르는 나팔꽃 모습이 내 꼴(?)만 같다)


나는 여전히 아프다.

중년으로 향하며 몸 상태가 빚어내는 증거들로만 볼 수는 없다. 부실한 체력 탓이라 여겨진다. 소소한 집안일을 하면서도 끙끙거린다. 밤이면 여기저기 쑤신다고 주물러라 두드려라 외친다. 어느 순간 버림받을 상상도 가끔 한다. 더 이상 쓸모없어진 고물취급을 받지는 않을까 두려워진다.

아직 남편의 인내심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조금 안심하게 되지만 금세 지긋지긋하다며 나를 밀쳐버리지는 않을지. 

 

며칠 전, 남편을 향해 홈쇼핑중독에 걸린 남자라며 구시렁거렸다. 프라이팬 세트 주문한 것을 알고 조금 투덜거렸지만 쉽게 화해했다. 아내를 위한 특별배려 이벤트였다는데 필요이상 언성 높인 것 같아 내 쪽에서 꼬리를 내렸다.

다음날 택배로 계속 전해지는 물건들.

보약달이는 기계부터 비닐포장 하는 도구, 온갖 한약재들이 배달되어 온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 워낙에 자신이 즐겨하는 취미생활용품을 자주 사기도 했다. 그 정도이겠거니 했는데 품목들이 엄청나다.

아껴놓은 비상금을 다 쓰는 모양이다. 금방이라도 따져 물을 태도로 다가서니 혼자 흥이나 먼저 말을 꺼낸다.

“내손으로 직접 골라 달여야지! 건강원에 맡기면 믿을 수가 있나.”

얘긴즉, 물가에 가족나들이 갈 적마다 잡아 모아놓은 다슬기를 넣고 보약을 달인단다. 골골한 아내에게 최고의 약재를 골라 직접 달이고 싶어 구입 했다는 거다. 

기계를 펼쳐놓고 사용설명서 꼼꼼히 읽던 날부터 남편 모습은 오랜 경력의 한의사가 되어간다. 눈금을 들여다보고 약재 선별해 넣는 태도가 어찌나 진중한지 근접하기 힘들도록 위엄 있어 보였다.

일 단계를 해결했는지 고개 끄덕이며 혼잣말 한다.

“음, 이대로 사흘정도 푹 달이면 완성이야!”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주방바닥에 앉아 보약기계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보약 먹여놓고 튼튼해지면 다시 부려먹으려는 속셈이지?”

“흐흐흐, 그걸 어떻게 알았냐?”

주거니 받거니 우스개 소리를 해본다.


몇 시간이 흐른 뒤부터 집안에 한약냄새가 진동을 한다.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는 코를 틀어쥐고 불만이 가득하다.

“뭐야 이게! 냄새가 지독해서 속이 울렁거려. 토할 거 같단 말이야.”

지극한 아내사랑 때문에 남편만 딸아이 투정을 듣는다. 괜히 미안해진 나는 말더듬이처럼 겨우 한마디 해본다.

“딸! 솔직히 그 정도로 심한냄새는 아니잖니? 견딜만한데 뭘 그러셔!”

밤낮 달여진 보약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주일예배에서 돌아오니 당장 보란 듯이 비닐 팩 한 개를 내민다. 엄중한 경고라도 내리듯 남편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이거 하루 세 번 꼭 챙겨먹어! 공복에 먹으면 더 좋으니 빼놓지 말고 먹어야 돼 알았지? 대답 안 해?”

누가 교사 아니랄까봐 학교수업의 연장이다.

나는 말 잘 듣는 학생이 되어 조그맣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빠졌다. 건망증의 최첨단을 걷고 있는 아내 챙겨야 할 일이 또 생긴 거다.

제 때에 먹으라는 말을 홀라당 까먹고 딴 짓 하면, 득달같이 달려와 남편표보약을 내민다. 시간되었는데 왜 안 먹느냐고.

아침과 저녁엔 집에 있으니 안심인데 직장에 있는 낮 동안이 걱정인가보다.

“점심때도 잊지 말고 꼭 먹어 알았지?”

‘알았지?’라는 말에 얼마나 힘을 주는지 바싹 몸이 움츠러들었다. 벌 받는 학생기분이다.


자동비닐 팩에 담겨진 보약뭉치가 냉장고 한 칸 차곡차곡 담겨졌다.

어젯밤, 제 2탄 보약재를 달이기 시작한다. 온 집안에 또 냄새가 가득하게 넘쳐난다.

하교 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딸의 찡그린 얼굴이 떠오른다. 뒤이어 들어오며 제대로 챙겨 먹었느냐 다그쳐 물을 남편의 봉황 눈썹 찡긋거려지는 인상도 보인다.

분에 넘치는 행복이다. 이렇게 누려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누군가 시샘하여 박살내버리면 어쩌지?

아니다. 꼬박꼬박 보약 잘 챙겨먹고 기운내서 내 울타리 지켜야 마땅하다. 본전 값은 해야 하지 않은가. 


불볕 기운 이글대는 이천구년 칠월 한 여름날.

사랑은 보약을 타고 온 동네 골목마다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2009년 7월 6일

남편이 달여 준 보약이 고마운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