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골 터럭하나
분명 또 한 가닥 박혀있을 거다.
들춰보지 않아도 촉각이 한 곳으로 일제히 곤두서는 거기쯤이라는 걸 안다.
육감적인 몸매에 깊은 가슴 골짜기를 갖추고 있다면야 고개 끄덕여질 일이다.
허나 두루 뭉실 짤막한 내 신체엔 가당치 않은 것이 ‘육감적’이라는 표현이다.
시도 때도 없이 툭하면 은밀한 그곳이 근질거리니 참을 수가 없다.
대충 무시하고 하던 일 계속하거나 딴 것에 관심을 두려 해도 온 신경이 가슴 중앙으로 모아진다.
결국 참지 못하고 윗옷을 벌러덩 들쳐 올린 후 집어내야 직성이 풀린다.
다행스럽게도 집안에 혼자인지라 보는 이가 없다.
어찌된 것이 머리카락 딱 한 개가 가끔 가슴 골짜기 중간부분에 딱 걸려 가뜩이나 예민한 속내를 부글거리게 한다.
설거지 하다가도 스멀거리며 갯지렁이 한 마리가 온 몸을 훑어내리 듯 내려오다 가슴골중앙 떡하니 걸려있는 상상에 개운치가 못하다.
닦던 그릇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은 후 물 묻은 손 앞치마에 대충 문지르고 앞섶을 들추는 꼴이라니.
고개 숙이고 부실한 가슴골을 내려다보면 역시나 검은 터럭 한 개가 걸쳐져 있다. 브래지어 중앙쯤에 꽂혀있기도 한다. 슬그머니 녀석을 끄집어낸다. 오래전 박힌 왕 가시 하나 빼내버리는 쾌감에 슬슬 웃음이 나온다.
누군가 몰래 내 꼴을 지켜보았다면 집게손가락 세워 머리 옆에 동그라미 여러 겹 돌려 그렸겠지. 얼빠진 여편네로 보였을 거다.
사계절 내내 가장 기본적인 속옷만 챙겨 입는 습관이 있다.
산후조리 하느라 내복을 챙겨 입어 보았지만 온몸에 비계 덩어리 둘러차고 있는 비둔함이 느껴져 며칠 입다 벗어버렸다. 아무리 추워도 위아래 속옷은 오로지 한 개씩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어쩌다 빠진 머리카락이 몸을 타고 내려오다 살갗에 걸리는 것이다. 겉옷 중간부분에 민소매 속옷이라도 챙겨 입었다면 한줄기 터럭이 헝겊 틈에 끼어 줄 수도 있건만, 맨살뿐이니 달랑 브래지어 한 중간에 올라앉는 거다.
보통사람보다 지나치게 성격 예민한 탓일까. 머리카락 한 개가 거슬리는 순간을 참지 못한다.
집안일 하는 혼자만의 시간이라면 음흉한 미소 지으며 슬쩍 겉옷을 걷어 올리면 그만이다.
아이 낳고 탄력 없어진 젖가슴 내려다보다 자조 섞인 위안으로 혀를 끌끌 차기도 한다. 홀로 있기에 부려보는 여유이다.
문제는 공식적인 행사나 부모회의 등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자리이다.
한 줄기 가슴골을 타고 뭔가 내려오는 느낌이 들 때 나의 오만상은 있는 대로 찡그려 진다. 좌불안석하다 화장실행 두발직행코스에 불을 댕기고만 싶다.
앞에서 연설하는 진행자이거나 선생님의 말이 한마디도 귀에 와 닿지를 않는다.
기어코 단상에서 연설중인 사람을 무시하고 화장실로 간다. 비좁은 공간에 숨어 터럭 하나를 찾아내야 안심이 된다. 자리로 돌아와 앉으면 비로소 평정을 찾는다.
다른 사람들도 이 모양일까.
머리카락 자주 가슴팍에 걸리는지, 설사 근질거리는 터럭이 있을지라도 나만큼 안절부절 정신없어지는지 묻고 싶다.
어찌 보면 이런 극한 예민함도 중병이다.
내속에 더한 무게 들보는 확인하지 못하면서 작은 티에 전전긍긍 하는 꼴이다.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곱지 못하게 치켜뜨던 나의 눈 꼬리는 어떠했는가.
혹여 그들에게서 먼지크기 티라도 발견하면 혈안이 되어 잣대 세우고 비판을 일삼는 것에만 침 튀기었으니.
정작 내 몸을 스쳐가는 미세한 터럭 한 개도 용납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마침내 찾아내어 제거를 해야 회심의 미소 짓게 되는 날카로운 성품의 여자이다.
도저히 이런 됨됨이로 누구에게나 덕으로 다가서겠다던 것은 꿈만으로도 욕심이다.
그나저나 앞으로도 계속될 가슴골 난리굿을 어찌해야할지 걱정이다.
국가경제도 어렵고 정치판도 뒤죽박죽인데 거국적인 고민을 끌어안고 끙끙거리지는 못할망정 겨우 터럭 하나 때문에 이러다니 하여간 나는 연구대상이긴 하다.
자가진단 하건대 그렇다는 얘기다.
배우 율브리너 처럼 아예 반질대머리로 밀어버릴까?
2009년 4월 29일 밤에
가슴골에서 머리카락 하나 은밀하게 집어내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