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해 어디로 가요?
엊그제 금요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들의 인지학습치료가 있는 한 시간 동안은 신속하게 여러 일을 해야 합니다.
근처 마트에 가서 저녁 찬거리 사고 은행일도 봅니다.
문구점에 들러 아이의 준비물을 챙기는 일도 있지요.
우편물 발송하는 일도 그 시간에 처리해야 계획적인 하루가 된답니다.
그날도 마트에서 장을 보고 바로 옆 빵집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땅만 보고 부산히 걷는 제 앞에 신발하나가 다가섭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교복 입은 고등학교 이학년쯤 된 사내아이가 서있습니다.
발음도 엉성하게 뭔가를 묻는듯합니다.
잘 안 들린다는 제 말에 남학생이 말합니다.
“저어, 아줌마! 속해 어디로 가요?”
“뭐? 뭐라구?”
‘뭐?’라는 소리가 좀 컸던지 지나가던 행인이 슬쩍 쳐다봅니다.
“속해요. 속해 어디로 가면 되냐구요!”
다시 물어오는 그 남학생의 말에 고개만 갸웃거렸지만 잠시 속으로 뜨끔했지요.
사실 오전에 속회예배를 교회집사님들과 드리고 오던 차였거든요.
제 귀엔 분명 ‘속회’로 들렸답니다.
혹시라도 우리교회 학생을 몰라보는 것은 아닌가하여 제가 되물었습니다.
“학생 우리교회 다니나? 저기 있는 ㅇㅇ교회 말이야.”
“예? 아뇨.”
“그럼 어느 교회 다니는 데 속회를 물어?”
감색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비웃듯이 쳐다보더니 내미는 말.
“아니요. 속초해수욕장 어디로 가느냐고요!”
젠장! 뭐 이런 경우가 있답니까.
간략하게 줄여 쓰기 좋아하는 세대들의 신조어였습니다.
어디선가 커다란 망치가 툭 튀어나와 녀석의 머리통을 자동으로 냅다 쥐어박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오지랖 하는 성격인데 훈계하듯 따발총을 쏴버릴까 고민도 했지요.
아무리 끼리끼리의 문화가 범람하는 시대라지만 이건 너무하는군요.
불혹 갓 넘긴 저도 못 알아듣고 동문서답하게 되는 이 단어들이 연세 지긋하신 어른들에게는 외계언어가 되겠지요?
어금니를 앙다물고 남학생의 아래위를 쭉 훑어보며 답해주었습니다.
“큰길 쪽으로 나가서 쭉 걸어가면 돼. 걷기엔 먼 거리니까 버스 타든지.”
걸음을 옮기려는 걸 잊고 한참이나 녀석을 쳐다봤습니다.
더 긴말 안하길 잘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우리 집에도 그렇게 혀 짧은 아이가 있지요.
딸아이도 엄마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벅벅 소리 지르며 그것도 모르냐고 합니다.
텔레비전프로그램 이름도 두자쯤으로 줄여놓고 말을 시작하니 멍청하게 딴소리만 하게 됩니다.
전부가 줄여 쓰느라 난리가 났습니다.
시간에 쫓기고 말하느라 혀에 근육통이라도 왔는지 뭐든 짧아지고 있습니다.
학교과목도 전부 줄이네요.
바른생활은 ‘바생’이고 슬기로운 생활도‘슬생’으로 자연스럽게 모두 외칩니다.
“엄마! 오늘 기가시간에 말이야...,”
“뭐라고? 기가가 뭐야? 새로 생긴 과목이니?”
“참나! 엄만 것두 몰라? 기술가정말이야.”
딸아이도 거리에서 마주친 남학생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속초해수욕장을 ‘속해’라고 부르면 속초시민 누가 알아듣습니까?
언제부터 끼리끼리 문화에 이렇게 목숨 내걸게 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대세가 그러니 따라야 한다는 일부 층도 있다지만, 저는 그저 허허롭기만 합니다.
올바른 단어 제대로 읊어대는데 걸리는 시간이 그리도 단축되어야 하는 것인지요.
물론, 대중적이거나 공동으로 이미 알려진 문구에는 좀 너그러워 질수도 있겠지만 그 교복남학생은 정말이지 쥐어박고 싶을 정도였답니다.
이런 신조어들에게는 어쩐지 경로사상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못 알아듣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향해 비웃듯 낄낄대는 손자 앞에서 늙음은 또 얼마나 초라하며 외로워지는 걸까요.
역시나 ‘속해’를 나불거리던 남학생은 실실 웃으며 일행 곁으로 갑니다.
뭐라고 일러바쳤는지 모여 있는 대여섯 명 무리의 시커먼 녀석들이 저를 쳐다보며 웃네요.
자기네들끼리 내기라도 한 모양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상대로 토막 난 말 알아듣는 어른 몇이나 될까하고.
아무래도 속초시장님 만나러 시청나들이 가야할까 봅니다.
시장님은 알고 계실까요?
속초해수욕장 새 이름이 ‘속해’로 바뀐 것을.
가정에서 내 아이만이라도 제대로 된 말 쓰기를 알려주고 싶지만, 널브러지고 쪼그라든 언어들이 천지에 넘치니 어찌해야 할지요.
여러분! 올여름에 ‘속해’ 오실래요?
알아들으시겠는지요?
2009년 4월 19일에 씁쓸하고 속상해진 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