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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념 한 사발 - 배은하고도 망덕한 놈


BY 박예천 2009-04-01

 

배은하고도 망덕한 놈


생각 같아선 벌거벗겨 물볼기라도 흠씬 쳐주고 싶은 녀석.

절대로 피붙이 욕을 드러내놓고 글로 풀어놓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지만 자꾸만 입에 게거품 고여 못 참겠다.

정말이지 칙칙한 가정사는 밝히기도 싫었고 되도록 희망 섞인 글로 독자와 만나고자 하였는데 머리보다 손가락이 먼저 자판을 두들겨댄다.


삼남매의 맏이로 태어난 나는 아래로 사내동생만 둘이다.

인생 여차여차해서 이십대 꽃다운 시절을 막내 동생 뒷바라지로 다 보냈다.

당시 시골중학교에서 전교일등 하던 녀석은 배움의 터전을 더 큰물로 정하라는 담임교사 말에 힘입어 누이의 둥지 속으로 끼어들어왔다. 대도시 고등학교에 덜컥 합격해놓고는 다짜고짜 책임을 지라는 태도로 들이댔다.

만만한 게 맏이였던가.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직장 가까운 곳 마다하고 출퇴근 두 시간 걸려야 하는 곳으로 자취방을 옮겼다. 모두가 녀석 때문에 일어난 상황들이다.

아들이기에 부모로서 걸어 둔 기대가 컸고 꼭 그만큼의 무게가 딸인 내 어깨를 짓눌렀다.


전세 이백만원의 단칸방은 궁색하고 초라하기만 했다. 부엌엔 수도조차 없었으며 연탄아궁이 하나뿐이었다. 안채와 행랑채가 이어지는 부분을 허술하게 담벼락으로 대충 막은 그야말로 헛간 같은 곳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폭염이거나 한파 몰아치거나 물 길어다 통에 붓고 밥을 했다. 비상금 모아놓은 것으로 석유곤로 사고 찌개를 끓였다. 그놈의 연탄불은 왜 툭하면 꺼지는지. 애초에 부실공사였던 게다. 눈물 질금거리며 번개탄에 불을 붙이노라면 한기서린 부엌담벼락에선 휑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솜이불 덮고 누워 천장 향해 입김을 쏟아내노라면 하얗게 뿜어 나오던 겨울 한기.

생활비 한 푼, 동생 녀석 옷가지 한 벌 사주지 않는 부모님은 쌀과 연탄이면 되겠거니 했나보다. 평생 고향땅 한번 떠나지 않은 아버지의 고지식함이 엿보이는 단면이었다.


어떠한 현실에도 나는 불평할 수가 없었다.

마치 그것이 순종이며 효도라고 세뇌라도 당한 듯이 살아냈다.

한참 곱게 피어나던 때에 사랑이라고 찾아온 남자를 소개하면 아버지의 대답은 무겁게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딸이 시집갈까 두려운 낯으로 이어지는 말.

“너 시집가면 막내는 어쩌냐? 공부는 다 시키고 결혼해라!”

소리라도 냅다 지르고 싶었으나 숙명인양 받아들였다. 미련한 꼴이라니.

여러 번 청혼을 해오는 남자가 있어도 동생 밥해 먹이고 입혀야하니 접으라는 것이다.

젠장! 울지 않으려 아까부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건만, 이 대목에서 목울대에 거친 돌멩이 하나가 넘어가나보다. 숨이 멎을 듯 가슴이 울컥거린다.

지지리 궁상 옛 이야기는 그만 접기로 하자.


녀석에게 어떠한 결과물을 기대했거나 은혜 갚기 바란 적이 없다.

그저 사람답게 제구실 잘 했으면 싶었다. 최소한의 배려도 지닐 줄 알고 머리는 차갑더라도 가슴이 뜨거운 인간으로 자라주기를 기도했었다.

허나, 아무래도 녀석 망쳐놓은 게 누이인 나 자신이라는 자책감을 버릴 수가 없다. 도시아이들 속에서 기죽을까 좋은 옷 사 입히고 부족함 없이 갖춰준 생활태도가 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놈으로 만들어 놓았나보다.

중학교마치고 어머니 품 떠나 공부만하는 게 안쓰럽다는 이유로 받아주고 채워주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새벽밥 해먹이고 도시락 두세 개 싸주며 정성들이지 말아야 했다.

명문법대를 마치고 사법고시 한번 낙방하더니 국제법률사무소에 굵직한 자리 맡았다며 잘 지내는 듯하다. 여우같은 부인 얻어 귀여운 딸도 낳고 제법 가정 잘 꾸려 살고 있다. 그거면 되지. 저 잘살면 되지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맘 비우고 산다지만 녀석에게는 잔정이 없다.

부모이건 형제이건 자기 손해나는 일은 절대 안한다. 모든 것이 계산적이다.


매월 고향출신 선후배간의 모임이 있는 모양이다.

마침 이번 모임이 막내 동생이 거주하는 수도권도시에서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파트구입해서 새로 이사한지 몇 해가 되도록 못 가본 것이 미안하기도 했던 차에 전화통화중 들떠 물었다.

“어머! 거기서 모인다구? 이번엔 나도 가고 싶다....갈까?”

누이가 이정도 말했다면 선뜻 오라고 하거나, 말 꺼내기 전 누이 한번 다녀가라 할 줄 알았다.

녀석의 대답에 맥이 탁 풀리며 가슴중앙으로도 뭔가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거기서 어떻게 와 너무 멀잖어. 오는 건 좀 그렇지!”

평일도 아니고 주말모임인데 멀면 얼마나 멀 것이며 요즘 전국 일일생활권인거 배운 놈이 모르나?


안 간다. 안가!

에라! 천하에 은혜를 배신하고도 덕까지 상실한 놈.

유식한 말로 그걸 배은망덕한 놈이라 하는 거다. 알겠느냐?

배은(背恩), 은혜를 배신 한 것만으로도 기가차고 어이없는데

망덕(忘德), 덕까지 잃고 사느냐.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런 배은하고도 망덕한 놈아!

 



2009년 4월 1일 막내 동생 녀석 두들겨 패주고 싶은 날에.

(다써놓고 보니, 아뿔싸! 만우절이네 그려.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