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 이야기
드디어 봄 산이 제빛을 찾는다. 눈 쌓인 설악은 움츠렸던 기지개를 켠다.
산 아래 항구도시에도 때 아닌 서설이 내렸다. 차가운 결정체이건만 봄꽃 속에 쏟아져서인가 오히려 포근한 빛이다.
속초에 살다보면 봄에 만나지는 눈 무더기쯤은 놀라울 일이 아니다.
어느 해 봄날에도 폭설 내려 함박 피어나던 꽃잎이 움찔 오므라들기도 했다.
남편과 아이들이 사진나들이를 떠난 휴일오후.
빈집에서 나와 벗하는 것은 컴퓨터뿐이다. 오래전 써 놓은 글을 되짚고 추억 묻어나는 사진들도 펼쳐보았다.
남편이 찍어 둔 야생화사진 몇 점이 눈길을 끈다. 아니, 사진이기보다도 함께 했던 시간과 공간으로 거슬러 가본다.
남편과 내가 불쑥 사진기를 걸고 떠나는 나들이는 언제나 설악의 한 줄기이다.
이름 모를 계곡이거나 산등성이라 해도 설악산의 들숨날숨이 만져지는 곳이다. 논두렁 곁 시냇물에 목축이어도 그 줄기 역시 설악이 흘려보낸 물 타래인 것이다.
야생화와 처음 만났을 때의 경이로움을 잊지 못한다. 흔하게 널려있던 것들이 새롭게 다가와 박히는 신선한 충격이라니.
십여 년 아들을 등에 업고 팔에 걸리며 조기치료실만 찾아다니느라 하늘 한 번 쳐다보지 못하고 살았었다.
돌 틈이며 낙엽아래 앉아 야무지게 나를 올려다보던 꽃들의 웃음이 내 삶 곳곳에 오래 간직되어 있다.
은방울꽃을 보았던 그 날.
위에서 내려다보면 넓적한 초록잎사귀만 가득하다. 과연 꽃이 숨어있을까 낮은 포복자세로 앉아야만 보인다. 잎사귀 밑을 살짝 들춰보면 금세 쪼로롱 방울소리가 울려날 듯하다.
꽃잎의 모양은 또 어떠한가. 참으로 소박하고 귀엽기만 하다.
중학교 때 처음 입어본 교복 생각이 났다. 풀 먹인 하복의 하얗게 눈부시던 짧은 소매처럼 보였다. 네 살 박이 쯤 되려나. 어린 계집아이가 입고 있을 주름 잡힌 블라우스도 떠오른다.
한참을 풀밭에 배를 깔고 엎드려 앙증맞은 은방울꽃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노란꽃다발을 세워들고 있는 듯한 금마타리.
여린 초록줄기 위로 꽃잎 여럿을 세워들고 있다. 오가는 이들을 향해 마치 축하메시지 담은 꽃다발 하나 수줍게 내미는 모습이다.
아기자기한 이야기 쏟아내며 얼굴 부비는 꽃잎에 봄날도 노랗게 부서져만 갔다.
일제히 한 곳을 향해 부르짖는 파란 꽃잎 현호색.
나는 이 꽃을 쳐다보다 그만 까르르 웃어버렸다. 오선지에 파란음표들을 매달고 행진곡 외치려는 나팔수차림이다. 꽃잎의 오른쪽쯤 잘 차려입은 지휘자가 팔을 휘젓고만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먹이 물고 온 어미 새를 향한 둥지 속 새끼들의 입놀림으로도 보였다.
보고 느껴지는 깊이가 다르니 야생화속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까치에게도 수염이 있었을까.
하얗게 무리지어 늘어진 꽃송이 이름이 ‘까치수염’이란다. 많은 이름 중에 하필이면 까치의 수염으로 붙여졌는지. 특이한 이름덕분에 기억력 형편없는 나에게 오래도록 남아있다. 꿀이 잔뜩 들어있을 포도 한 송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잘한 꽃무더기에 만개하면서 봉오리로 기다려지는 질서가 전부 담겨있다.
야생화 이야기는 펼치는 순간부터 끝이 없음을 느낀다.
몇 가지만 더 풀어놓고 접을까 한다.
그러고 보니 푸른 새싹이 돋기도 전에 먼저 피어나는 야생화도 있었구나.
설악산 중턱쯤이었을까. 겨우내 쌓이고 썩었을 낙엽무더기 틈으로 보랏빛 점들이 눈에 띄었다. 아니 점이라기보다 보라색 별들이 내려앉아 반짝이고 있었다.
떡갈나무 잎들과 마른 솔가지 얼기설기 포개진 틈새로 반짝 빛나며 나란히 줄지어 피었다.
남편을 손짓하여 불렀다. 꼭 이 네 송이 구슬붕이를 사진에 담아 달라 떼를 썼다. 이름만큼 빛이 나던 꽃이었다. 구슬붕이.
야생화들은 이름 속에 얼굴이 숨어있다. 생긴 대로 불러주기를 좋아한다.
설악산을 내려오던 오솔길 따라 구슬붕이가 일렬로 데굴거리며 따라오지 않을까 가슴이 부풀었다. 녀석들 얼굴이 참으로 정겹고 귀엽기만 하다.
금낭화를 사진에 담던 남편이 말했었다.
“꼭 양 갈래 머리 묶은 계집아이 같지 않니?"
그랬다. 분홍색 조바위를 눌러쓴 여인네가 살포시 웃는 양으로도 보였다. 꽃들에게 묻어나오는 이야기는 새롭게 전환되기도 했고 잊었던 유년의 한 부분이기도 하였다.
아장아장 걷던 나의 영아기에 어머니가 손수 짜준 레이스 뜨기 방울모자도 되었다.
마지막으로 꽃 이름 하나만 더 불러줄까 한다.
인동초. 담벼락이나 나무 등걸을 타고 올라가 넝쿨로 뻗는다. 진분홍 꽃이 곱기만 하다. 가만히 꽃의 이름을 되새겨본다. 겨울을 참아냈다는 깊이가 들어있다.
마침내 봄을 알리며 만개하려 혹한을 이겨냈다는 말이다. 긴 겨울 속 인내가 사무쳐 분홍으로 피었다.
나는 무엇을 참아냈는가. 꽃을 피우기는 고사하고 인내할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놓치고 산다.
야생화들은 수줍어서 고개 들지 못한다.
비바람 이겨 낸 장한 얼굴이건만 소박하고 여린 모습으로 부끄럼타며 겸손하다.
그저 가늘고 작아 거친 삭풍한파를 이겨냈으리라 믿기 어려운데 다소곳하게 앉아 흙냄새만 맡고 있다.
내 삶 은 야생화를 닮을 수는 없는가.
누군가 찾지 않아도 늘 그 자리에 한 폭 그림으로 앉아 은은한 향기 간직할 수 있었으면.
2009년 3월 29일 옛 사진 속 야생화를 보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