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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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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릿골 23 - 덕호 할아버지


BY 박예천 2009-01-14

덕호 할아버지

 

 

 

마을 공판장 가려면 손에 땀을 쥐어야 한다. 좌우를 살핀 후 재빠르게 앞만 보고 달음박질 쳐야한다. 슬쩍 곁눈질이라도 하는 날에는 볼때기 상납을 당한다. 번갈아 양쪽이 얼얼하도록 꼬집히고 손자국이 벌겋게 되어야 끝이 난다.

양지바른 중간 뜸 앞마당에서 그는 늘 졸거나 가래 끓는 소리로 존재감을 확인시킨다. 긴 막대기로 땅바닥을 후벼 파기도 하고 바지 끈 아래 대롱대롱 달린 담배쌈지에서 잎담배를 말아 피우기도 한다. 

공판장 가는 지름길이 있기는 하다. 꼬불꼬불 골목길을 돌아쳐야 하는데 멀기도 하지만 승일네 뒷간이 버젓이 밖으로 나와 있어 내키지 않는다. 똥물이 흘러 길바닥에 넘칠 것만 같은 허술함이 싫다. 곁을 지나는 내내 입안에 고인 침을 퉤퉤 뱉느라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그리고 거긴 밤에 도깨비불이 나온 곳이라지 않은가. 멀어도 돌아가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그것이다.


할머니 심부름으로 공판장에 외상값 갚으러 간다.

봄볕에 하늘이 박살나서 곳곳에 꽃가루를 뿌려대고 있었다. 길을 걷다가도 꾸벅꾸벅 졸고 싶은 나른함이 밀려왔다.

땅바닥에 돌멩이하나 발견하고 운동화신은 앞발로 굴리며 걷고 있었다. 구르다 아슬아슬 논두렁 가장자리에도 닿고 데굴거리다 수챗구멍에도 들어갈 뻔 했다.

공판장 가는 길 까지 굴리며 갈 작정이다. 돌멩이 하나에 촉수를 곤두세우고 공굴리기를 하고 가느라 어디쯤 지나치는지 무심했다.

땅바닥에만 던져두었던 눈길을 들자 이런! 바로 덕호 할아버지 집 앞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걸음을 옮긴 것인지 그는 한 발짝 앞쯤에 서있다. 뒷걸음 치기에도 내달리기에도 어색한 자세로 엉거주춤 있었다. 저만치 저 혼자 굴러가다 민들레꽃 무더기를 짓누르고 있는 돌멩이에만 눈 흘긴다.


이어지는 순서는 덕호 할아버지 손길에 자동입력 되어있다. 나는 그저 가만히 통통한 볼때기를 적당한 시간쯤에 놓아주기를 기다리면 된다.

뭐 대단한 이유라도 있어서 엄지와 검지손가락 사이에 눌러 쥐고 흔드는 게 아니다. 한 마디 뿐이다.

“으이구! 구여운것! 느히 할아버지 어디계시냐?”

“몰라요! 경로당 아니면 똘똘네 사랑방에 계실 거예요.”

대답을 했으면 잡고 흔들었던 볼때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게 이치 아니겠는가.

허나 나는 알고 있다. 단답형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재차 이어지는 평범한 질문들을 이미 모두 외워버렸다.

“너 몇 살 먹었냐?”

“여섯 살이요.”

아! 볼때기가 드디어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놓아주세요! 제발. 늙은 할아버지만 아니라면 욕쟁이할머니한테 전수받은 대로 한 다발 쏘아대련만.

여전히 손을 볼에서 떼지 않은 상태로 묻는다.

“근데, 너 시방 어디 가냐?”

“공판장에 가요. 할아버지...! 아퍼요!”

거의울상인 내 모습을 보자 손가락에 더 힘을 가한다.

“거긴 왜 가냐? 집 앞에 장씨네 가게 있는데...., 멀리까지 가냐?”

“할머니가 외상값 갚고 오래요. 엉...엉!”

드디어 참았던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나서야  손가락 힘이 느슨해진다.


민들레꽃 무더기에 굴리던 돌멩이를 맡겨놓고 오던 길을 되돌아 달린다.

도저히 이대로 공판장에 갈 수 없다. 그의 만행을 천하에 알리지는 못해도 집에라도 신고해야 한다. 꺼이꺼이 울며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절구 공이를 들고 나오시던 어머니와 툇마루 봉당 앞에서 마주친다.

“아니 너 왜 다시 오냐? 그리고 뭐 땜에 울어? 응....말해봐!”

설움이 복받쳐 말이 나오질 않는다. 어깨만 들썩이고 콧물이 범벅인 채 헉헉거렸다.

“헉!헉....헉! 으...엉엉...엄마, 저기...흑흑..엉.....덕호가....덕호새끼가....엉엉....”

“누구? 이름이 뭐라고? 어디 사는 녀석인데? 친구야?”

“아니......, 엉엉....덕호 있잖어 저기 사는 중간 뜸 당숙아저씨 옆집에....,”

“뭐라구? 얘가..., 그분은 할아버지 친구 분인데 이름을 함부로 불러? 욕까지 하고.”

그렇다. 할아버지 단짝 친구가 맞긴 하다. 할아버지가 이따금씩 붙이던 말 끝.

‘아, 덕호 그놈이 글쎄...., 덕호새끼가 말이여....,’

나는 잘못이 없다. 할아버지 옆에서 들은 대로 이름 붙였을 뿐이다.

어머니는 머리를 쥐어박으며 빨개져 화끈거리는 볼때기가 안중에도 없는지 버르장머리 없는  말투라고 야단만 친다. 억울하고 분하다. 울음이 진정된 나의 말대꾸가 이어졌다.

“근데...., 왜 덕호는 나만 보면 여기 이렇게 꼬집어?”

“네가 귀여우니까.....,그러는 거야. 친구 손녀딸이니까...., 이뻐서.”

말도 안 된다. 두 번만 예뻤다가는 볼때기 뿐 아니라 볼기짝도 닳아 없어질 거다.

“어른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돼! 더구나 할아버지 친구 분인데....,”

울 할아버지는 왜 그런 친구를 사귄 걸까.


어느 날인가는 학교앞집 은영이와 길가다 동시에 잡힌 적도 있다. 덕호 할아버지는 손재주가 좋다. 한 번에 두 아이 볼을 양손으로 늘어지게 꼬집을 줄도 안다. 한마디로 쌍 볼때기 꼬집기 달인이다.

멀찌감치 팔자걸음 그가 담배쌈지라도 흔들며 걷는 모습을 볼라치면 냅다 줄행랑을 쳐야한다. 꿈속에서 호랑이를 만났을 때 아무리 진땀나게 뛰어도 제자리인 상황. 그게 현실에서 일어난다. 덕호 할아버지 만나지는 순간이 그렇다. 마음은 제트비행기인데 걸음이 굴렁쇠 굴리기다.

뒷덜미를 잡혔을 때 그 아찔한 순간이라니.


진짜 궁금하다. 어릴 적 내가 귀엽고 예쁘긴 했었나?

지금 꼴 보니 소가 웃을 일이로다.

 


 

2009년 1월 14일 유년 그리워 지는 겨울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