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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릿골 19 - 때 벗기기


BY 박예천 2009-01-05

 

                때 벗기기

 

 

 


 “가만 좀 있어라 그렇게 움직이면 때를 어찌 밀라고 그러냐? 아이고! 여기 때가 엄청나다. 까마귀가 보면 동생삼자고 하겠다.”

어머니는 등이며 겨드랑이를 밀 때마다 간지러움을 견디지 못해 발버둥을 치는 우리 삼 남매의 등을 사정없이 손바닥으로 철퍼덕 때린다. 내일은 학교에서 신체검사를 한다는데 행여 시커먼 때가 보이면 친구들이나 선생님 앞에서 망신이라도 당할까봐 전날 이렇게 대행사를 치르는 것이다.


저녁설거지를 끝내놓고 큰 가마솥 가득하게 군불 지펴 물을 끓였다. 지금이야 화장실에 말끔한 욕조가 있어서 물을 가두기가 간편하기도 하고 버리는 일에도 어려움이 없지만 그때는 시뻘건 고무함지가 유일한 목욕통이었다.

부엌바닥은 단단하나 흙으로 되어있어서 행여 물이라도 흘릴라치면 질척해지기 일쑤였다. 목욕은 뒷전이고 물장난을 치면 어머니한테 한소리를 듣기도 하고 몸에 손자국이 나도록 맞기도 한다.


유난히 간지럼이 심한 나는 겨드랑이에 어머니 손이 닿는 순간부터 자지러지게 까르륵 넘어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차라리 한 대 맞는 게 낫지 간지러움을 참는 일은 숨이 넘어갈 듯 힘이 들었다. 적당히 때가 불으면 서열 순대로 맏이인 나 먼저 어머니의 때밀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 손으로 대충 밀다가 사각모양 가장자리 까만 줄 그려진 공포의 이태리타올이 엄마 손에 끼워지면 살갗이 쓰릴 정도의 아픔을 각오해야 한다.

그 수건을 왜 ‘이태리타올’이라고 이름 지었는지 지금도 자세히 모른다. 이태리에서 수입을 해온 것인지 그 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때밀이 수건이라서 그렇게 불렀을까.

적당히 밀고 끝났으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몸에 발그레한 자국이 남도록 닦아야 만족해하신다. 아무리 조심해도 짓궂은 남동생들의 철퍼덕거림이 금방 부엌바닥에 물을 흘려 어머니의 날카로운 꾸중소리를 듣는다. 물이 많이 넘치면 아궁이까지 흘러 들어가고 아침밥을 지으실 때 땔감에 불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이 고무 통에 물을 채우시기 위해 양동이로 몇 번이나 날라서 퍼부으신 걸까.

대충 문을 닫았지만 아직 봄이 무르익지 않은 꽃샘추위라서 그런지 나무쪽 틈새로 바람이 술술 들어온다. 순번에 의해 먼저 통 밖으로 나온 나는 입술을 덜덜거리며 어머니가 닦아주는 까슬까슬 수건에 알몸을 맡긴다.

가장 깨끗한 물에 안전하게 때를 벗기고 나오니 맏이의 특권은 대단하다.

동생들의 목욕통에는 내 몸을 떠난 때들이 물결치며 떠 있으리라. 일종의 승리감마저 느끼며 오들오들 떨면서도 그 자리에 서서 벌거벗은 채로 동생들의 의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족들 중 사내아이 먼저라는 일반적인 질서를 과감히 떨치신 분이 내 어머니이셨다. 아들이라 위하고 좋은 것 먼저 챙겨주는 다른 분들과는 달리 언제나 나를 먼저 위해 주셨다. 부뚜막에 열 한 식구 밥을 주걱으로 퍼 담아 일렬로 늘어놓으실 적에도 할머니는 사내 녀석인 두 동생 먼저였고 나를 꼴지 번호에 넣으셨다.

언제나 그것을 지켜보며 입이 뾰족하게 나오던 것을 아셨던지 어머니는 든든한 맏이로 나를 자리 매김 해 주셨다.

 

떨고 있는 나를 보시던 어머니가 “얼른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있거라” 하신다.

안방 옆 나무마루를 쿵쾅거리며 뛰어, 우리 방인 건넛방으로 들어가니 따끈한 아랫목에 이불이 가지런히 펼쳐져 있다. 빳빳하게 풀 먹인 홑이불이 사각거리는 느낌으로 내 몸을 맞이한다. 때를 벗은 나는 온몸에 날개라도 달린 듯 상쾌한 가벼움을 느끼며 코끝으로는 어머니냄새를 맡는다. 이불 속은 어머니 몸에 붙어있던 젖 냄새 같은 특유의 나 혼자만 감지해내는 냄새가 난다. 젖 냄새라고 굳이 표현을 하는 것은 어머니가 막내 동생에게 젖을 물릴 때 꼭 이런 냄새가 났었기 때문이다. 절대로 싫지 않고 마구 안기고 싶은 내 어머니만의 냄새였다.

이불 속에서 사르르 잠을 불러대고 있으려니 두 동생 녀석들이 마저 방문을 열고 들어와 내 곁으로 나란히 눕는다. 서로의 몸이 스치면 차갑다고 소란을 떨어댔다.

방문 밖 마당에서는 고무함지 그득했던 땟물을 양동이에 담아 바깥 수챗구멍으로 버리시는 어머니의 나머지 정리소리가 들려온다.

가뿐한 몸을 나란히 눕히고 우리 삼 남매는 쥐 오줌 무늬 가득한 천장을 쳐다보며 키득거렸다. 가끔 쥐가 부스럭대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입가에 손을 모아 쥐고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 녀석씩 잠이 들었고 꿈속에서도 깃털을 달고 날 듯 포근한 잠 속을 날아다녔다.  

 

지금 내 친정에는 물 받아 목욕시킬 아이도 없고 부엌보다는 주방이라 부르는 거실과 함께인 공간이 생겨주었다. 수세식 화장실 겸 욕실에서 때를 벗기는 일까지 편하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목욕통 고무함지는 이른 봄 볍씨를 담아 싹을 틔울 때만 가끔 요긴하게 사용하신다.

어머니에게 아직도 내 등을 철썩 때리시며 빡빡 밀어주실 힘이 남아 있을지.

할 수만 있다면 그 함지에 한번 몸 담그고 어머니께 전부 맡겨봤으면 좋겠다.

몸에 달라붙은 때와 덕지덕지 욕심으로 얼룩진 내 흐린 속내까지 닦아 달라 졸라대고 싶다.



2004년 1월 27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