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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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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 놀이터에서


BY 박예천 2009-01-05

 

놀이터에서

 

놀이터가 비에 젖는다.

여섯 개의 벤치 중 한 개만 남고 모두 축축해졌다.

정자 모양으로 지은 곳의 지붕틈새가 엉성하니 그럴 만도 하다.

유일하게 한 개 남은 자리가 뽀송하게 말랐건만 젊은 총각이 앉아있다.

어색한 웃음 흘리며 지나치려는데 남은 반쪽을 양보하는 젊은이.

“여긴 젖지 않았으니 앉으세요!”

흘깃 보니 이십대 후반쯤이다. 아무리 넉살좋은 여편네라도 나는 여자인걸.

망설임은 잠시 궁둥이를 들이밀고 슬쩍 걸터앉으며 슬며시 면적을 넓혀갔다.

가방, 우산, 시장 보퉁이 등을 옆으로 쭉 늘어놓았다.


아들의 치료가 진행되는 한 시간은 금 쪽같이 쪼개어 나 자신만을 위하여 투자된다.

그나마 가벼운 시집과 수필집이라도 펼쳐 볼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곳, 바로 놀이터이다.

운이 좋으면 밤새 골머리를 싸매던 글의 줄기가 소재를 부여잡고 미끄럼틀을 타기도 한다.

제대로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제목만 그네 위에서 달랑달랑 흔들리는 날도 있다.

똬리를 틀고 뭉쳐진 글이 정글짐 위에서 땀을 뻘뻘 흘리느라 시간을 다 까먹은 날도 허다하다. 뭐 대단한 작가라도 되는지 내 꼴을 보고 있노라면 갖은 폼은 다 잡고 있다.


젊은 청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휴대전화를 들고 저 만치 땅바닥에 쪼그려 앉는다.

아줌마의 천연덕스러움에 기가 질려버린 걸까.

아닐 거야. 연인과의 은밀한 속삭임에 감미로움을 더하기 위해서겠지.

조금이라도 덜 비참해지기 위해 변명으로 포장하기 바쁘다.

덕분에 더 넉넉해진 의자위로 이젠 신발 벗겨진 발까지 무릎쯤에서 엇갈려 꼬인다.

때로 이런 뻔뻔스러움이 고된 육신을 쉬게도 해주는구나. 젊은이 고맙군!


장대비는 그치고 물안개의 기운만 남아 나붓거리니 얼굴이 간지럽다.  

노약자(?) 아줌마에게 자리를 통째로 양보한 의지의 청년은 발이 저린지 엉거주춤 일어선다. 좌로 삼보, 우로 대 여섯 보씩 반복 진행을 하며 빼앗긴 자리에는 욕심을 버린 듯하다.

귀에서 전화기를 아직도 떼지 못한 채 말이다.

남이야 전화기로 귓구멍을 쑤시던 귀를 막던 뭔 참견인가.

쓰려던 글이 안 풀리니 놀이터의 배경인물을 청년으로 정하고 괜한 생각 잇기만 하고 있다.


얼추 시간이 되어간다.

늘어놓았던 잡동사니들을 거두어야 하리라.

별것도 아닌 것에 또 고민이 시작되는 아줌마.

그냥 뚜벅뚜벅 가버릴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갈까.

청년의 인물이 박색이거나 몸체가 짜리몽땅했다면 그런 고민 따위는 애초에 하지 않았으리. 하지만 겁나게 잘생겼는 걸.(흐흐흐, 음흉하게 속으로만 웃어본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늘어진 뱃살을 최대한 감추며 챙긴 가방을 들고 숨을 몰아쉰다.

그래. 동방예의지국이 아니었던가. 고마웠다는 인사정도는 해도 될 거다.

“이제 여기 앉으세요. 고마웠어요”

내 목청에도 이런 톤이 가능했던가. 거의 꼬물꼬물 지렁이표이다.

“아, 네....” 청년의 간단한 대답을 듣고 일어선다.

돌아서 걸어오는데 뒤 꼭지가 따갑다.


그렇게 오늘은.....,

비오는 놀이터에서 몽상가의 머리로 빈 종이에 낙서만 잔뜩 채우다 왔다.



2004년 7월 2일 비 맞은 놀이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