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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 놀이터에 가는 이유


BY 박예천 2009-01-05

 

놀이터에 가는 이유

 

 


 

다시 놀이터의 계절이다.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이거나

모진 비바람 쏟아 붓는 폭풍의 날들만 아니라면

놀이터는 의당 내차지다.


집 근처 낯익은 놀이터를 팽개치고,

아침마다 버스와 택시를 번갈아 타며 이곳을 찾는다.

특별히 아름다운 풍광이 서려있거나,

은밀한(?)만남이 계획된 것은 아니다.

한 시간쯤 소요되는 아들의 치료시간을 보낼 마땅한 장소가 없다.

선생님 개인가정에서 이루어지다보니

거실에 멀뚱히 앉아있기가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니다.

궁여지책으로 찾아낸 장소가 바로 이 놀이터이다.


아이들이 등교한 시간의 놀이터는 늘 한산하다.

가끔 지름길삼아 아파트단지로 진입하는 어른들은 있지만,

나처럼 눌러앉지 않는다.

자칭 놀이터의 단골 방문객으로 인정 된지도 어언 두해가 되어간다.

아들의 집착 증세를 닮아가는 지 놀이터에서의 지정석은 변함이 없다.

정자모양의 지붕아래 가지런한 여러 개중 세 번째 것이 내 자리다.


보는 이가 없으니 퍼지고 눕지만 않았지 자세는 있는 대로 흐트러진다.

신발을 벗어놓고 못생긴 맨 종아리를 장의자 길이에 질세라 쭉 뻗는다.

읽다 만 책을 펼치거나 알맹이 없을 낙서 한 줄 붙잡고 있노라면

세상누구도 부럽지 않다.

담장을 따라 둘러쳐진 초록병풍.

적당히 불어주는 해풍에 간지럼을 참지 못하고 어깨들끼리 부딪힌다.

키득거리는 나무들의 웃음소리가 내 겨드랑이까지 건드리며 말을 건넨다.


‘냉방 중’이라고 굳세게 써 붙인 은행 안은

땀을 식히려는 부인네들이 내뿜는 입김으로 질식할 지경이다.

자판기커피를 마시러 들어갔다가 채 오 분을 버티지 못하고 나와 버렸다.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벽이라도 뚫을 기세로 커지는 목소리들과 닮은 내 자화상. 

서둘러 달려온 도피처가 바로 이 놀이터이다.


어느 날은 만취한 백발노인에게 오래 익숙한 내 자리를 홀랑 뺏기기도 하지만

그리하여 드러누운 노인이 속히 제 정신을 차려주기를 속말로 중얼대다

한 시간이 접힌 적도 있지만

여기가 아니면 잠시 가져보는 생각의 정리정돈이 없어진다.

얼기설기 포개진 머릿속을 흔들어 깨워보는 유일한 시간이다.

이때 비로소 하늘빛이 제대로 보이고

일상의 군더더기들이 과감히 잘려나가기도 한다.


폭설에 묻히거나 한파로 얼어버리는 겨울이 오기 전에 충분히 누려야한다.

동상 걸린 도로를 걸어 은행건물이나 관공서 구석진 대기실에 쭈그려 앉는 것보다

놀이터가 몇 배는 배부르다.


시장에서 돌아오던 여인인가.

옥빛 양산으로 해 한 쪼가리 가리고

장바구니를 질질 끌다시피 걷다가 흘깃 내 쪽을 본다.

대낮에 팔자 좋은 여편네다 싶었을까.


날이면 날마다,

조각조각 흩어진 삶의 모자이크들을 끼워 맞추기 위해

나는 지금 놀이터 지정석 목재의자위에 앉아있다.


2005년 7월 19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