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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의 잉걸불


BY 박예천 2009-01-05

 

                내 글의 잉걸불

 


 

글 쓰는 일이 고통이라는 것을 이제 조금은 알겠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라고 했듯이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지금처럼 힘이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겁 없이 덤벼들었고 오로지 열정만 가득했으므로 앞 뒤 가리지 않고 마구 쏟아내기만 했다. 읽고 격려주시는 주위의 관심에 기고만장해지며 우쭐대었던 내 모습이 부끄럽다. 차라리 일기 간단히 적던 몇 년 전이 그립다.

가까이 지내는 인생 선배들은 좋은 글을 쓰려면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막힘이 있을 때는 잠시 비껴 쉬어도 가고 어느 정도 감정의 골에 글 샘이 고였을 때 퍼 올리면 된다는 것이다. 여유를 배우지 못한 나는 자꾸 스스로를 채근 질 하게 된다.

부족한 문학적 감성에도 잘 마른 장작을 던져 넣었을 때처럼 불꽃이 활활 타오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양한 인생경험도 못했으면서 농익은 글 욕심만 내는 것은 어찌 보면 때 이른 자책일수도 있다.


부족한 글이나마 쓸 수 있도록 영향을 준 불쏘시개 네 사람이 내 인생에 있었다. 나는 희나리여서 불꽃이 잘 일어나기에는 어림도 없는 됨됨이를 지녔다. 그다지 풍부한 문학적 감성도 갖지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인가 특별활동 반을 정해야했었다. 여섯 살 차이나는 막내고모와 의논을 했다. 소질여부는 기억에 없는데 고모는 문예반을 권해주었다. 후에 여고 졸업을 할 때까지 습관처럼 문예반활동을 했다.

사회 첫발을 내딛던 내게 고모가 해준 말이 아직도 또렷하게 떠오른다.

“월급봉투를 받으면 제일먼저 서점에 가서 책 한 권을 구입 하거라. 매달 그렇게 월급날 사보도록 해.”

책을 통해 지적인 갈증을 풀고 풍부한 감성을 키워가라는 훌륭한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막내고모는 내 첫째 글쓰기 불쏘시개로 인정되기에 족한 분이다. 

 

두 번째 영향을 주신 분은 중학시절 국어선생님이다. 한글날 백일장이 있던 때 학교별 글쓰기 주제는 당연히 ‘세종대왕’ 이었다. 거의 모든 학생들은 한글창제의 위대함과 세종대왕의 업적을 내세우는 글을 올렸다.

사춘기 반발심이 작용했던 것일까. 당시 나는 참으로 엉뚱하고 조금은 도발적인 내용의 글을 썼다.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것에서 벗어나 다분히 비판적이며 왕으로서 권력만 누릴 것이지 뭐 하러 사서 고생한 것이냐는 식의 내용을 적었다. 교실을 돌며 선생님이 내가 쓴 원고를 친구들 앞에서 읽어주시며 하시는 말씀.

“심사위원들이 이런 글은 당장 던져버리겠지만 나라면 네 글을 뽑겠다.”

고정관념을 벗어나 실험정신의 글쓰기도 해야 발전할 수 있고 평범하지 않은 관찰이 좋은 글을 쓰는 계기가 된다고 오히려 나의 기를 잔뜩 세워주셨다.   

 

세 번째로 꼽을 수 있는 분은 여고시절 문예반 선생님이다. 그나마 백일장 몇 번 나간 경험이 있는 터라 선택의 여지없이 또 문예반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사실 글쓰기보다 솔깃했던 것은 굽이치는 남한강을 바라보며 시 낭송하는 것이 꽤 운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차츰 학교를 대표할 일이 생길 적마다 선생님은 나를 추천하신다. 볼멘소리로 다른 친구들의 이름을 말씀드려보았다. 세련된 문장을 구사하던 아이와 철학적인 용어도 곧잘 인용하던 또 다른 친구를 내보낼 것을 부탁드렸지만 허사였다. 자신감 없는 시골뜨기 여고생에게 힘을 실어주시던 그 한마디가 지금껏 글과 나를 붙잡아 매는 아교풀이 될 줄이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감동 받는 글을 쓰도록 해라. 어려운 말로 써야만 좋은 글이  아니다. 너에겐 글을 풀어 가는 능력이 있어.’

선생님의 말씀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우선 기분이 좋아졌다. 체면처럼 걸어두고 삶의 버팀목으로 삼았다.

 

마지막 네 번째.

나와는 운명적인 만남의 사람이다.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이 되었으며 호적등본에 당당히 아이들의 아버지로 올라와 있는 남편이다. 그를 자신 있게 네 번째 불쏘시개로 인정하는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실은 특별하게 영향력을 끼쳤거나 큰 도움을 준 것은 없다. 허나 십 여 년을 넘게 자신감 잃고 평범한 아낙으로 살림재미에만 푹 빠져 있던 나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준 것이 참으로 고맙다. 아내의 능력을 조심스럽게 인정해주며 가끔씩 일침을 놓아주던 속 깊은 사람이다.

“아무리 이론을 많이 알고 있으면 뭐하냐 열심히 쓰는 사람에게는 못 당한다.” 힘을 실어주는 남편의 말을 빌미 삼아 되지도 않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도록 일깨워주셨던 네 분의 따사로운 불씨에 잉걸불로 타오르지 못하고 눅눅한 습기에 젖어 헤매고 있는 지금의 내 꼴이 한심할 지경이다.

안으로 채워지지도 못했으면서 섣부른 욕심만 앞서 글쓰기를 고심한 몇 날이었다.

평생을 걸쳐 좋은 작품 한편 써보는 것만이 소원이라 말했던 소박한 순수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불꽃이 일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나를 다독이며 곁에서 풍구질 해준 분들을 기억하며 잃었던 용기를 되찾게 된다.

때가되면 타오를 수 있는 것을.

무르익은 내면 불씨가 번져 내 글의 잉걸불 되어 줄 날이 올 것임을 놓치지 않고 살아야지.

그리하여 차게 경직된 사람들 가슴은 온기로 데워주고 어두운 그늘 속에 갇힌 이들에게는 빛으로 다가서는 감동의 글쟁이가 되었으면 한다.

꿈으로만 머물지 않고 정말 인생의 끝 부분에서라도 활활 타오르는 잉걸불 되기를 손 모아 본다.  



2004년 12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