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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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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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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록


BY 박예천 2009-01-05

 

                       나의 신록

 


 


경기도 여주 마릿골 땅에 씨 뿌려져 싹과 잎으로 자라다 줄기만 머쓱하게 자란 이십대에 고향을 떠났다.

어른께 고분고분 하지 못하고 옳은 말은 꼭 하고 마는 버릇없는 성격이라 아버지는 사회생활 첫발 내딛는 것을 만류했었다. 살림이나 곱게 배우다 시집가면 된다 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싫다며 뭐 대단한 인물이라도 되겠다싶어 박차고 도시에 갔다.

몇 년 세월 어렵게 모아놓은 적금으로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을 때도 아버지는 나이 먹어 결혼생각 않는다며 나무랐다. 중학교 마친 막내 동생이 수원에 있는 고등학교에 합격하면서 녀석의 뒷바라지는 내차지가 되었다.


학교근처에 방을 구하러 아버지가 상경하셨고 되도록 월세 아닌 전세였으면 좋겠다고 종알거렸다. 학생들을 상대로 월세 놓고 돈을 벌려는 주위 주택가에는 전세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어렵게 집을 구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집의 형태가 시골의 고향집만도 못한데다가 낡고 허술한 흙 담벼락은 곧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고층 아파트 곁에 그런 집이 남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동생의 입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아버지께서 오셨다. 쌀 몇 말과 연탄 백장을 사주시며 집으로 가시려 한다.

“밥은 어디에 해먹어요?”

놀란 눈으로 여쭈니 연탄불에 하면 되느니라 한마디만 남기고 가셨다. 아무리 농사일만 했던 분이라 해도 세상물정을 어찌 저리도 모를까 속으로만 되씹었다. 직장에 출근을 해야 하는 바쁜 아침에 연탄불 하나로 밥을 지어먹고 찌개도 끓여야 한다. 한숨짓는 내 앞에 동생이 통장하나를 내민다. 중학시절 푼푼이 모은 것이라며 전기밥솥이라도 사자는 말을 한다. 거금 칠 만원 주고 전기 보온밥솥을 사고 내 돈을 보태 석유곤로도 들여놓았다. 곤로에서 끓인 국이나 찌개는 동생이 씻는 동안 연탄불에서 데워졌고 밥은 씻어 안치기만 하면 머리 빗고 화장할 때쯤 풍풍 김을 내 쏟는다.

그때부터 웬만한 것은 부모님께 손 안 벌리고 해결하려 애썼다.

밑에 구멍이 뚫렸는지 한 두 방울 석유가 새는 곤로를 처분하고 꼬깃꼬깃 모은 돈으로 가스레인지를 들여놓았다. 두 군데서나 파란 불이 일렁이는 것을 보며 꽤나 행복해졌다. 찌개는 물론이고 이제는 볶음이며 지짐까지 곁들일 수 있어졌다. 그저 동생에게 한 가지라도 맛난 것을 더 해줄 수 있음이 기쁨이었다.  


지금도 막내 동생과 만나면 그때를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 띠게 된다. 전세 이 백 만원의 허름한 단칸방에서 책상하나 들여놓지 못하고 동생을 공부시켰다. 여름이면 김치한통 주인집 냉장고에 넣기 위해 갖은 아부를 해야 했다. 부엌 안에서는 생쥐가 밤낮으로 돌아다녔다. 그래도 그을음 짙은 석유곤로 위에서 찌개는 잘도 끓었다. 지금처럼 배달이 되지 않은 때라 석유통 들고 먼 길을 걸어 팔이 휘도록 받아오곤 했다. 여름엔 차라리 연탄을 때지 않으니 편했다. 찬바람 부는 겨울이 닥치면 좁은 방안의 냉기는 입김까지 얼려버릴 기세로 우리 남매 품을 파고들었다. 마당 중앙의 수도가 얼면 뒤란에 두레박 우물에서 양동이로 물을 길어다 설거지며 음식 만들고 빨래도 했다.

 

빨래가 잘 마르지 않는 겨울철엔 꽤나 애를 먹었다. 아무리 꽉 쥐어짜도 얼어버린 옷은 쉽게 동태 꼴이 되었다. 바로 옆방에 세 들어 사는 동식이네는 우리보다 나은 형편이라 탈수기를 마루에 놓고 산다. 염치 불구하고 물기 젖은 빨래를 마지막 헹군 후 탈수기를 빌려 썼다. 전기코드가 밖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방안으로 들여놓은 선은 주인이 전기 구멍에 넣어야 휘휘 돌아간다. 몇 번은 쑥스러운 말투로 부탁을 드렸지만 나중엔 얼굴이 철판이 되어 가는지 탈수기 속에 빨래를 미리 넣고 천연덕스럽게 전기코드를 꽂아달라고도 했다.

물러터진 흙덩이 같던 내가 구르고 부딪히다보니 스스로 단단한 돌멩이가 될 줄이야. 오히려 지금은 그런 용기가 다 어디론가 사라져 거꾸로 나이를 먹는 여자가 되었다. 코맹맹이 소리로 잘 울기도 하고 히죽거리며 웃는 일도 더 많아졌다.

 

주인집 김장하는 날.

다듬고 버릴 푸성귀 무더기 중 배추 잎 성한 것이 출근하는 눈에 제법 많이 띄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조심스레 “아줌마, 저거 버리실 거죠? 제가 좀 추려갈게요.”하며 싱싱한 것으로 골라 왔다. 삶아서 우거지를 만드니 국도 끓이고 나물로도 몇 번 무쳐 먹을 수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해서 그렇게 산 것은 아니었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사지 않았고 아껴 쓰며 살고 싶었다. 작은 것에 행복할 줄 알았고 헛된 꿈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며 자족하는 법을 배웠던 때였다. 이제는 이십대의 고생스러움 들이 살면서 가끔 그리운 추억덩어리가 되었다.


삼 년 고생 끝내고 동생이 대학을 가게 되면서 나의 뒷바라지도 터전을 옮겨오게 된다.

새로 이사 온 집에는 방 한 칸에 부엌 달린 집이다. 여전히 연탄 갈아야 하는 집이었으나 동생과 내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던 것은 부엌에 수도꼭지가 붙어있어서였다. 팔 아프게 물을 길어다 붓지 않아도 된다는 그것만으로 오래오래 가슴 벅차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하찮고 가벼운 변화이건만 어찌나 가슴 짜릿하게 감사한 나날들이던지.

조금씩 돈이 모아지면 하나씩 세간들을 들여놓았다. 기억에 남는 굵직한 물건들을 떠올려 본다. 탈수기를 시작으로 냉장고, 화장대, 책상, 옷장 그리고 나중엔 꿈에서나 그리던 피아노까지 턱하니 들여놓았다.

이사를 몇 번이나 더 했을까. 방 두 칸에 거실 달린 말끔한 집에 이사 가는 날은 자꾸 눈물이 나왔다. 별로 내세울만한 자랑거리는 못되는데 나는 지금도 이삿짐 하나는 끝내주게 잘 싼다.


불혹 넘긴 내게 가장 힘들었던 시절을 말해보라면 이십대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내 인생의 신록인 이십대 계절이 없었다면 가을도 오지 않았으리라.

이글거리는 태양을 이겨내고 폭풍우에도 푸른 잎 잘 간직하며 견뎌냈기에 열매 매달고 단풍들 자격 있었노라 스스로에게 외쳐대고 싶다.

아직 내 몸에 달린 열매들은 설익어서 떫거나 신맛이다. 고통이나 힘겨움 없는 결실을 기대함은 스스로 우매한 자임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신록이 간직되기까지 나는 부단히 애쓰며 노력했다고 당당히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가을을 맞는다.

고생이라 말하기 싫어 좋은 경험이니 체험이라 표현하는 나의 이십대는 그렇게 지나갔다. 싱싱하게 견디며 작고 소박한 행복으로 물기 올랐던 내 신록이 고맙다. 낙엽으로 기울어 나목이 된들 결코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다.

인생초록의 한 끝자락 베어 물고 오래 버티는 내 생애 전부가 되었으면 좋겠다.



2004년 10월 1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