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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 꽃신


BY 박예천 2009-01-05

 

꽃신



만 원짜리 꽃신하나 샀다.

말이 꽃신이지 사실은 발등부분에 꽃 한 송이 달린 슬리퍼이다.

어린 시절, 꽃신이 신고 싶어 멀쩡한 운동화를 봉당에 박박 밀어 구멍을 냈다. 영악스러운 나의 계산에 아버지는 일부러 속아주셨는지 읍내 장날 코가 봉긋 올라간 꽃신을 사오셨다.

내 나이 사십을 바라보는 이즈음 고무신은 아니지만 꽃신이 신고 싶었다. 

색이 얼마나 요란스러운지 그걸 골라잡는 내 손길에 스스로 놀라 자빠질 뻔했다.

한 가지만 고집하던 취향이라는 것도 때로는 반란이 필요한가보다.

 

우리 집 신발장 문을 열면 천편일률적으로 소위 고상하다는 색의 신발들만 즐비하다.

밤색, 까만색만 가득한 그곳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문득 가슴이 답답해지는 날이 있다.

특히 하늘빛이 암회색이거나 장대비가 쏟아지는 오늘 같은 날은 증상이 극도로 심해진다.

우울한 기분을 털어 버리기 위해 일부러 감자를 갈고 야채를 썰어 부침개를 해먹는다.

지글거리고 부산을 떨다보면 바깥공간의 빛깔을 잠시 잊을 수 있다.

장마철 눅눅한 습기가 계속되는 날은 외출할 때 화려한 색의 옷을 꺼내 입는다.

빳빳하게 풀 먹인 흰옷을 입기도 하고 발가락이 다 보이는 샌들에 매니큐어도 칠해본다.


아들의 장화는 구천 원이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말대로 생각지도 않았던 꽃신을 집어 드니 만원이란다.

장화만 사들고 뛰어나올 것을 그랬나?

못생긴 발가락들이 삐죽이 붙어서 지들끼리 종알대고 있다.

그 동안 답답해서 속 뒤집히는 줄 알았다느니 바깥공기가 엄청나게 신선하다느니 말들이 많다. 덩달아 내 걸음도 땅위에서 떠다닌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형형색색 꽃신만 길을 걷고 있다.

맨발로 끝없이 펼쳐진 꽃밭 위를 뛰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딸아이가 꽃신을 보더니 대뜸 “엄마! 색종이로 오려붙이기 한 신발 같다”며 웃는다.

엄마의 정신연령을 의심하는 눈빛이 역력하다.

만원의 행복을 발바닥에 붙이고 비오는 거리를 철퍼덕거리며 걸어 다녔다.

누가 뭐라 말하든 개의치 않고 ‘나만 좋으면 땡’이라는 글자도 꽃신 밑에 구겨 넣고 밟아댔다.

꽃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우와! 정말 기분 째지는 하루였다.  

  


2004년 7월 2일 충동구매가 꽃신뿐이었음이 다행스러운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