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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릿골 18 - 고구마 캐는 날


BY 박예천 2009-01-05

 

고구마 캐는 날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어머니는 늘 집에 계시지 않았다.

이른 새벽밥을 지어놓고 부뚜막에서 신 김치 몇 조각에 물 말은 밥을 뜨는 아침엔 여지없이 고구마 일을 가신다.

그런 날은 학교에서 돌아와도 대문 앞에서부터 가방을 내던지며 ‘엄마!’ 라고 부를 기운이 없다.

해가 기울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위가 어두워져야 신작로에 어머니모습이 보이게 된다.

거의 매일 남의 일을 가는 것은 우리 밭 고구마 캐는 날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숫자에 맞도록 일꾼을 모으려면 미리 다른 집 밭일을 해야 한다.

늦은 저녁밥을 드신 어머니는 아버지와 종이에다 이름을 적어가며 ‘몇 집 남았느냐, 사람이 거의 모였다’ 하시며 고구마 캐는 당일을 걱정하셨다.

 

우리 집 고구마 캐는 날.

집에서 한참을 가야하는 거리에 위치한 밭이라서 점심과 새참거리를 직접 산에서 끓이기로 했다.

물은 산 속 샘에서 길어오면 되고 나머지 식사준비 한 것을 수레에 싣고 간다.

도착해보니 벌써 줄기 거두는 작업이 절반은 끝나가고 있었다. 단으로 묶어 나르는 사람에서 밭두렁에 쌓아올리는 일까지 질서 있게 진행된다.

어느 정도 고구마 줄기를 따게 되면 기운 센 청년들이 덩굴을 뿌리째 둘둘 걷어 밭둑으로 올려놓는다.

이어서 호미를 든 아주머니들이 일렬횡대 밭으로 다가앉으신다.

살살 흙을 달래듯 이랑을 파 올리면 숨바꼭질하듯 고개 내미는 붉은빛 고구마들이 올라온다. 섣부른 호미질에 상처가 나기도 하지만 이미 오랜 경력들을 자랑하는 분들의 손길이라서 실수가 적다.

괜히 몇 번 따라하던 내가 동강난 고구마들을 사방에 흩어놓아 아버지의 눈 흘김을 받기도 했다. 그냥 잔심부름이나 할 것이지 오히려 방해만 된다 하신다.


길게 늘어진 흙 고랑 자궁 속에서 태어난 고구마들에도 이름이 붙여진다. 훌륭한 작명가는 늘 정해져 있다. 상(上)품이니 잔챙이니 하며 잘 고르시는 아래뜸 아주머니가 고구마 선별 작업에 뽑혀 우열반을 나누고 있다.

제값을 톡톡히 잘 받기 위해서는 포장하는 일에도 허술하면 안 된다. 빨간 그물자루에 크기별로 담겨진 것들을 경운기에 싣고 마을 앞 공터에 나르는 것은 아버지의 일이 된다.

단으로 묶여진 고구마줄기도 옆으로 차곡차곡 쌓여있고 뜨거운 태양 빛에 혹시나 시들까 얇은 천막을 덮어두기도 한다.   

세모꼴 산꼭대기로 여름 해가 제 머리를 기대려하는 오후가 되면 고구마 작업도 서서히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지막 새참을 낸 후 그릇을 정리하여 담고 포개는 것은 어린 내가 유일하게 도울 수 있는 일에 속한다.


고구마 캐기를 마치고 마당 안 까지 거뭇한 저녁색채가 드리워지면 피곤과 땀에 절은 아버지가 들어오신다. 뒤란 우물가 고무함지에 받아놓은 물로 어머니는 아버지께 목물을 해드리고 나는 저녁상을 보아 놓는다.

시원한 대청마루에 아버지와 트럭운전기사가 겸상으로 저녁밥을 드신다.

밤새 아버지는 거두어들인 고구마부대를 이끌고 서울 청량리 도매시장으로 가실 것이다. 새벽시장 열리는 때에 도착하시려면 늦은 밤에 출발해서 시간을 맞추어야 한다. 빛바랜 방벽에 언제나 걸려있던 아버지의 단벌 외출복도 서울 나들이를 서두르며 어머니 손으로 옮겨진다.

대충 먼지를 털어 내고 회색바지에 청 빛 문양이 들어 간 반 팔 셔츠를 입으신 아버지가 손수건을 챙겨 주머니에 넣으신다. 유난히 땀이 많으신 분이라서 언제나 손수건은 아버지 몸에 붙어 다녔다.

트럭에 고구마가 산더미로 오르고 조수석 앉은 아버지를 향한 가족들의 배웅인사 속에는 고구마가 경매에서 제 값 잘 받게 되기를 바라는 한 가지 마음만 담겨있다.

 


다음날 점심때가 지나서야 서울 가셨던 아버지가 손에 종이꾸러미를 들고 푸석해진 안색으로 들어오신다.

신문지에 둘둘 말린 것이 돼지고기 서 너 근임을 눈대중으로도 알 수 있었던 것은 겉으로 붉게 배어 나온 핏물 때문이다. 고구마 팔고 온 저녁엔 돼지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입 소문을 내지 않아도 그때쯤이면 마을 어른들이 우리 집 마루로 한두 분 모여든다.

지금처럼 시멘트 벽안에 ‘거실’이라는 이름으로 마루가 꽁꽁 숨어버리지 않았던 시절.

누구나 지나가다가 엉덩이 디밀고 앉아 푸념과 참견을 할 수 있었다. 오신 분들이 한 결 같이 궁금해 하는 것은 고구마 시세가 어떻게 매겨지느냐 하는 것이다.

당장 내일부터 자기 밭 고구마들이 땅 밖으로 나올 텐데 미리부터 걱정이 앞서기에 대충이라도 알고 싶어서다.

운이 좋아 예상외에 값을 쳐 받았을 때는 자기 집 일 인 듯  손뼉 치며 좋아라하셨다.

 


며칠 전 밤 일꾼들 이름 적혔던 종이가 다시 방바닥에 펼쳐진다.

누구는 돈으로 줘야하고 어떤 이는 품앗이니 제외 된다며 어머니와 나누는 대화를 듣다가 잠들곤 했다.

월급쟁이 늘 부러워하던 아버지가 유일하게 몫 돈을 만져보시는 그날의 든든함은 오래지 않아 곧 긴 한숨으로 이어진다.


손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모두 남겨지는 것이 아니다.

봄날 융통해 쓴 농협 자금 갚으랴 가을걷이 준비할 돈이며 학자금으로 나뉘다 보면 오히려 빠듯해 지고 제자리인 셈이다.

가을추수를 제외하고 일 년에 몇 번 아버지가 손에 침 발라가며 지폐다발 넘기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고구마 팔고 온 다음날이 그렇다.

큰 마음먹고 냉장고가 집안에 들어오던 날도 청량리에서 만족스런 값을 받고 온 다음이었다.

집안에 전기제품이 많이 없던 그 시절 나는 마치 그것들이 부의 상징물인양 친구들에게 뽐내고 다닌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 붉힐 장면들이다.   

 

이제 그물자루 고구마는 상표가 인쇄된 종이상자에 담겨 판매된다.

아버지는 거대한 시멘트상자 집안에 누워 전대 동여맸던 배를 쓸어내리며 속병으로 아프다 하신다.

경운기 달달거리며 밭으로 나가실 생각도 없고 할머니와 나란히 병들어 계시다.


친정가면 고구마 빛으로 검붉어 지시는 아버지 안색을 대하며 쓸쓸해진다.



2003년 9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