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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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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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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손 선생님


BY 박예천 2008-12-27

 

                    약손선생님

 


목례를 하시는 선생님의 자세가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그뿐이었다.

이미 아들은 치료실 의자에 앉아 대기 중일 것이기에 서둘러 현관유리문을 닫아야 한다.

열중쉬어 자세로 양손을 허리뒤춤에 감추고 계셨다. 뒷걸음치며 나오던 나의 호기심엔 참을성이 없다. 더구나 얼핏 보니 두 손등에 하얀 붕대가 감겨져 있는 게 아닌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최소한의 인사치레로라도 상황을 여쭙는 것이 도리다.

무엇인가 대형 사고였음이 분명하다.


나오던 걸음을 멈추고 호들갑스럽게 이어지는 나의 질문에 차근히 말을 이으신다.

피부접촉에 유난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자폐아동이 치료과정 중 상처를 입혔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살이 닿기만 하면 피가 나도록 잡아 뜯으며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고한다.

왜 피하지 않고 그 지경까지 되었느냐는 물음에 힘을 실어 답해주신다.

“그 아이가 평생 가족하고만 사는 거라면 그냥 내버려 두지요. 하지만 어차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걸요. 사회 속에서 서로 어울려야 하는데 누구든 살갗이 닿기만 하면 꼬집고 때린다면 안 되지요. 제가 잠시 아프더라도 고쳐줘야 합니다.”

일부 특수학교에서도 자해나 공격성이 심한 아동은 격리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라며 붕대감은 손을 슬쩍 뒤로 감추신다.

속울음 한 덩이가 목울대를 넘으려 했다. 부모형제도 때로는 피하고 싶고 귀찮아지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대체 선생님 마음엔 어떤 심지로 밝힌 등불이 켜져 있는 걸까.

치료실 안으로 들어가시는 뒷모습이 산만큼 커보였다.


남편의 동료교사로부터 그 분을 소개받은 것은 아들을 데리고 서울 큰 병원을 돌아다니던 때였다. 국내에서 이름만 대면 알아주는 의사와 면담하고 수차례 걸친 검사에 조금은 지쳐있었다. 병원마다 내리는 진단도 가지각색이었고, 구태의연한 직업의식으로 형식적인 전문용어만 남발하는 의사도 있었다. 새로운 치료법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진단만 내려줄 뿐이었다. 당시 아들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했던 것은 현 상태의 검증보다 한시라도 늦출 수 없는 치료방법이었다.

복잡한 서울 중심가에서 햄버거 한 조각으로 시장기를 채우며 다음 검사날짜만을 예약하고 내려오던 날의 막막함이라니.

아들은 고속버스와 기차를 번갈아 타는 즐거움에 들떠 있었다. 제 부모의 한숨깊이는 아랑곳 않는 해맑은 웃음으로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조기치료전문가인 그분과의 만남이 약속되었던 날.

낙성대역 앞에 위치했다는 치료실을 찾기는 했지만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멀고 먼 지방도시 속초에서 무슨 수로 이용을 한단 말인가.

궁리 끝에 강릉의 언어치료실과 속초에 있는 감각치료만 병행하기로 결정했다.

서울의 치료실을 포기하고 내려오는데 어쩌면 아들의 절대적인 시기를 놓치는 것은 아닐까 맘이 무거웠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지막 간절한 심정이었건만 거리상의 이유로 포기를 해야 하다니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었다.

주어진 치료과정이나마 열과 정성을 다하면 결실이 있어지리라.

악을 쓰거나 울어 제치는 것이 의사표현의 전부인 녀석의 입술이 열리기를 바라며 일주일 내내 강릉과 속초를 오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전혀 기대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낙성대역 앞의 선생님이 그토록 만남을 가지려해도 연결될 수 없었던 분이 속초로 이사를 오신 것이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광이라고 해야 할까. 빛 한줄기가 응어리진 속내를 말끔히 녹여내는 듯 했다.

전국 어디보다 영동지역의 치료시설이 유독 열악하다며 새로운 계획을 품고 계시다고 했다. 아직 별도의 치료실 건물이 없어 자택에 있는 방 한 칸을 이용하지만 그저 감지덕지했다.


아이들을 대할 때 선생님손길은 어릴 적 밤새 배앓이를 쓰다듬던 어머니의 약손과 닮았다.

한 분야에 삼십 여년 넘게 몸담았으면서도 한결같은 겸손함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본다.

특수교사가 지녀야 할 덕목이 비단 기술적인 부분에만 있지 않음을 몸소 보여주셨다. 발달장애를 한 묶음으로 속단하는 것이 아닌, 아이마다 치료방법이 다르고 가능성도 무한하다 하신다.

권위만을 내세우는 일부 전문가들이 본받았으면 좋겠다.


선생님이 내 아들을 약손으로 쓸어주신지 일 년이 넘었다. 이제는 글을 깨우쳐 연필을 잡고 쓴다. 좋아하는 동화책을 들고 와 더듬거리며 읽기도 한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 한번 들어보는 게 소원인 날도 있었다.

약손치료법은 날마다 아들을 새롭게 변화시켰다. 녀석은 가끔 약은꾀를 부리기도 하는 악동이 되어가고 있다. 유치원에 가기 싫은 날이면 배가 아프다느니 이마가 뜨겁다며 꾀병을 부린다. 점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주저함이 없다. 이모두가 선생님 손길이 펼친 약효덕분이리라.

    

헬렌켈러 뒤에 설리번이 있었듯이 아들에게는 훌륭한 약손선생님이 동행하신다. 가끔 지치는 어미에게도 힘을 실어주신다.

세수할 때 조금 쓰라린 것 외에 불편함이 없다며 양손을 감추시던 선생님의 수줍은 모습이 떠오른다.

아들과 필연으로 맞잡게 된 약손.

오래도록 그 인연의 끈 지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2005년 7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