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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 애기


BY 박예천 2008-12-27

 

애기

 

 


가족들은 나를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부른다. 엄마, 여보, 언니, 형님 등등으로 불리는 이름 중 아직도 어색하기만 한 것이 있다. 바로 ‘애기’이다.

시아버님은 지금까지도 나를 ‘애기’라고 부르신다. 시집와서 처음 그 낯선 이름에 귀먹은 척 딴 짓만 하고 있으면 가까이 오셔서 “아가, 너 못 들었냐?” 하시던 아버님이시다. 맏딸과 누이로만 크던 나에게 그런 이름이 생길 줄은 몰랐다.


아버님이 집을 떠나 생활하신 것은 몇 해가 되신다. 거대한 산에서 중기인 드릴로 바위를 부수는 일을 하신다. 현장을 따라 전국 각지로 다니시느라 지금은 구미에 계시다.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한다며 가족 떠나 계신 생각을 하면 늘 마음이 아프다. 겨우 명절에나 집안행사 때 한 번씩 뵙는 것으로 아버님의 안부를 확인하곤 한다.


낼모레 아버님 생신인데 현장을 떠나실 수 없는 사정으로 이번엔 시댁에 못 오신다. 평소 값비싼 선물은 불편해 하시는지라 나는 평범하거나 늘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것으로 고르곤 했다. 재작년이던가. 열려있는 아버님의 배낭을 들여다보니 일기장과 필기도구가 있었다. 그것을 찾으시며 커다란 가방 속을 한참이나 더듬으시는 손길을 눈여겨봐 두었다. 생신선물을 고르던 나는 서슴지 않고 작은 손가방을 골랐다. 수첩과 필기도구는 필통에 넣어 준비했다.. 손수건 두 장까지 가방에 넣자 불룩해졌다. 지금껏 많은 선물을 드려봤지만 그날처럼 아버님께서 좋아하신 표정을 본적이 없다.

“애기가 내 맘을 꼭 아는구먼. 아주 좋다.”

엊그제 집안 행사에 오신 아버님은 그 작은 손가방을 여전히 지니고 계셨다.


올해는 어떤 선물을 좋을지 또 고민이 되었다. 우리 사는 형편이 뻔 한데 무리해서 준비하면 받으시면서 부담을 느끼신다. 정성이 담긴 것으로 해야 하는데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아버님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앙상하게 마르신 발목에 낡은 양말이 기억났다. 속옷과 양말로 결정을 했지만 아버님 계신 현장이 어디쯤인지 주소조차 모른다. 전화를 드려 아버님께서 숙식하시는 상호를 여쭙고 간신히 주소를 알아냈다.

“왜? 나한테 편지 보내려고 그러냐?”

대답대신 웃음으로만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다. 속초 사는 자식이 특산물이랍시고 맛보여 드린 적도 없기에 오징어도 한 축 사서 넣고 포장을 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사연을 써서 함께 넣었다. 택배를 받으시며 어떤 표정 하실 지 궁금해진다.


속내를 잘 드러내시지 않으시는 아버님이시기에 내가 어느 만큼의 며느리인지 알 수 없었다. 밥이 질게 되면 씹지 않고 넘기니 좋다 하시고 돌이라도 들어가면 바람 불어도 날아가지 않으니 다행이다 하시는 분이다.

시누이의 결혼식을 마친 후 시댁에 와 있을 때였다. 친지 분들 대접하느라 몇 가지 음식을 마련해드리고 빨래를 걷으러 나가는 내 귓전으로 아버님의 말씀이 들린다.

“저 애가 이번에 고생 많았죠. 맏이라 다르더군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신경 쓰는 게 안쓰럽지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다른 분들 앞에서 맏며느리를 세워주시는 아버님. 용돈한번 챙겨드린 적 없고 오히려 뵐 때마다 주머니에 몰래 돈을 챙겨주신다.

“너 맛있는 거 사먹어라. 아범 몰래 말이야.”


남편과의 연애시절 청혼을 받은 나는 결정을 하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했었다. 이 남자와 평생을 살 수 있을까. 선택에 대한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는데 과연 결혼을 해도 괜찮을까 하는 갈등으로 밤을 새우곤 했다.

인사를 드리러 원주시댁에 처음 방문하던 날. 차분하고 자상하신 아버님의 모습에서 나는 내 남편의 노후를 떠올려보았다. 아버지를 닮는다는 아들이라는 말을 믿기로 한 것이다. 결혼을 결정하고 지금껏 살면서 아버님과 판박이인 남편을 본다. 흔히 말하는 탁월한 선택을 한 것이라 자부한다. 


현장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 주무시지 않고 색색이 전선줄로 바구니를 만드신다. 바위를 발파할 때 사용하는 전선인데 가늘기도 하고 색깔도 예뻐서 갖가지 복조리와 장식품으로 탄생한다. 도자기모양이며 끈을 꼬아 손잡이를 길게 늘어뜨린 것도 있어 감탄하던 새댁시절 아버님께 뚜껑 달린 것을 만들어 달라 조른 적이 있다. 정말 몇 달 뒤 집에 오시는 아버님 손에 앙증맞은 바구니가 대롱거리며 따라왔다. 며느리 주실 양으로 늦은 밤 침침함을 돋보기에 의지하시고 엮어 가셨을 따스함이 만드신 물건틈새로 켜켜이 묻어 나왔다. 아직도 화장대위에 놓고 빗이며 작은 화장품들을 담는 요긴함으로 대신하고 있다.  


비가 많이 오던 어느 날. 나의 휴대전화 벨이 울린다. 화면에 찍힌 번호를 보니 아버님이셨다. 편하게 해주시지만 그래도 시아버님이라서 조심스레 전화를 받는다.

“애기냐? 비도 오고 현장 일도 못하니 이렇게 숙소에서 쉬고 있다. 애기 생각나서 전화했지.”

당신의 아들인 남편에게보다 나에게 더 자주 전화를 하신다. 전화의 내용은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대화가 아니다. 어느새 딸처럼 나는 아버님의 ‘애기’가 되어 응석 어린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아이들을 씻기느라 정신없는 순간에,

 내 휴대전화 멜로디가 들린다. 그 시간에 마땅히 올 전화가 없는지라 누구냐는 표정으로 받았다. 어제 보낸 택배가 벌써 도착했다는 아버님의 전화였다.

“애기야, 너 뭐 큰 상자 보낸 거 있냐?  나는 밖인데 숙소에서 택배 왔다고 하는구나.”

“아직 상자 안 열어 보셨어요? 확인하시고 전화하시지 그랬어요.”

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버님이 허허 웃으시며 다음 말을 하신다.

“웬걸, 벌써 옆에 사람들과 나누어 먹고 있다. 편지도 잘 읽었다.”

“경황없이 적어서 무슨 말씀을 드렸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구구절절이 꼭 필요한 말만 했다.”

평소에 편지를 자주 보내드린 적이 없는 나는 부끄러워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몇 가지 일상적인 안부를 여쭙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마지막으로 하시는 아버님의 익살스러우신 한마디에 뒤로 넘어질 뻔했다.

“애기야 근데 말이다. 생일이 한 달에 한 번씩이면 좋겠구나 허허허.”

이렇게도 좋아하시는걸, 왜 좀 더 일찍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재치 있는 척 세상물정 혼자 다 알고 있는 양 말만 잘하는 떠버리 며느리였다. 속옷 몇 가지와 오징어 한 축의 생신선물이 멀리 구미까지 달려가 제 구실을 잘 해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생신 지난 다음 추석날 모여 함께 음식이나 나누자는 어머님의 말씀과 전전긍긍 선물 고르느라 걱정할 막내동서를 배신한 것이 조금 미안해지지만 마음은 하늘을 날고 있다.

아무래도 후환이 두려우니 택배로 선물 받으신 것은 아버님과 나만의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드려봐야겠다. 선뜻 공범이 되어주실 아버님의 ‘애기’로 있어짐이 내게는 또 하나의 행복이다.

거실 벽에 걸린 가족사진 속 아버님이 나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으신다.

   


2004년 6월 8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