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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 속초, 나의 마지막 주소


BY 박예천 2008-12-27

 

 

속초, 나의 마지막 주소

 


 

때 이른 장마철이라도 된 것인가.

비가 참 많이도 퍼붓는다.

하늘에 거대한 구멍이 생겨 그 물줄기가 모두 아래로만 곤두박질치는 모양이다.


아들을 데리고 설악산 아래 위치한 장애인복지관에 가기로 한 날이다.

지난주에 검사를 마무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 2차 방문을 하게 되었다.


작년 한 해 동안 나는 얼마나 깊고 험한 지옥의 늪 속을 헤엄쳐 다녔던가.

아이를 들쳐 업고 남편과 서울의 그 유명한 병원과 아동상담시설의 문을 두드렸다.

이제 우리부부는 체념 아닌 사실을 인정하며 순리를 따르기로 했던 것이다.

발달이 지체된 아이를 수많은 자극을 통해서 홀로 서기 할 수 있게 돕도록 하는 부모의 역할을 남겨두고 있다.

부모가 가장 훌륭한 주 치료사임을 아이의 모습 속에서 문득 보게 될 때마다 의지의 한국인처럼 나는 긴장을 늦추거나 어두운 표정도 할 겨를이 없다.


강릉으로 언어치료 가는 날이나 원주로 놀이치료를 다니는 날 오늘처럼 비가 사정없이 퍼부으면 나는 평범한 여자 아닌 슈퍼우먼이 되어 아들을 포대기로 업고 우산을 받쳐 든다.

비라는 녀석은 오직 직선으로만 내려주었으면 좋겠는데 왜 사선으로 바람을 껴안고 내리는지 모르겠다.

포대기 속의 아들은 그런 대로 안심을 하겠는데 내 꼴이 말이 아니다.

젖은 생쥐 마냥 우스운 꼴이 된다.

엄마는 무엇이든 참을 수 있다.

모성은 넓고 강한 것임을 배우며 우리 어머니도 나를 그렇게 키우셨을 생각을 한다.


버스 안에 사람이 몇 안 되는걸 보니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에 모두들 꽁꽁 집안으로 숨어버려서 그런가보다. 

거추장스러운 손가방과 우산을 길바닥에 내던져 버리고 싶을 정도로 힘겹다.

동전으로 750원만 요금 통에 집어넣으면 노란색 7번 버스는 나를 안전하게 설악산 아래 위치한 정류장에 내려놓는다.

차안 열기 때문일까.

수증기로 뿌옇게 된 차창 밖으로 희미하게 바깥그림들이 펼쳐진다.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한 물방울들은 아래로 선긋기를 해대며 유리창을 장식한다.

아이가 볼 수 있도록 나는 재빠르게 손바닥을 내밀어 흐린 시야를 닦아준다.


밖으로 보이는 모든 풍경이 나무이며 산이고 바다이다.

정류장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운전석 앞 빨간 불빛으로 그려지며 내 귓전에 들려온다.

“이번 정류장은 산 뒤꾸미 마을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벼락바위입니다”

도시 어디에서 이런 정류장 안내방송을 들을 수 있을까.

예전 내가 살던 수도권이라면 분명히 ‘ㅇㅇ아파트앞, ㅇㅇ백화점....’이라고 했을 것이다.

고향처럼 푸근한 정류장 이름에서 나는 정겨움을 느낀다.

‘중도 문, 하도 문, 새마을, 해돋이공원, 민박마을.....’ 등등


속초로 처음 이사를 오던 해를 기억한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남편 발령 따라 무작정 오게 된 바다 섞인 도시.

백화점 하나 없다며 투덜거리기도 했고 물건 값이 왜 이리 비싸고 촌스럽냐고 푸념하기도 했던 오래되지 않은 일들이 기억난다.

가끔 도시로 나들이를 가게 되면 이제 나는 갑갑증을 느낀다.

강릉 가까이 도착해서 바다 가 눈앞에 펼쳐 질 때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내 불안증을 잠재운다. 

속초가 나의 고향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 아들의 채송화 꽃잎 같은 작고 앙증맞은 입술에서 ‘바다’ 라는 분명한 발음이 튀어 나왔을 때 죽어도 바다를 떠나지 않겠노라 머리에 흰 거품을 이고 춤추는 파도의 손끝에 내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지친 육신을 부대끼며 돌아와 누울 나의 마지막 주소가 되어 준 속초 바다 가 고맙다.


며칠 전 한 쌍의 애완용 토끼가 거실바닥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아들과 뒹군다.

아들의 정서에 도움이 될까 해서 남편이 사온 것이다.

이놈들이 꼭 똥을 싸면 한곳에 많이 해놓을 것이지 움직이며 다니는 곳마다 한 톨씩 흘리고 다닌다.

나는 눈을 흘기며 휴지를 들고 그 까만 콩알을 주우러 다니며 쫑알거렸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남편의 한마디.

“아들이 저리 좋아 하잖어. 똥 좀 뭉개면 어때?”


그렇다.

거실바닥이 온통 까만 점박이 무늬가 된들 어떠랴.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아들의 함지박 행복이 있는데 말이다.

잠든 아들의 손톱을 깎아 주며

어둠이 퍼지는 빈 공간마다 손수건만한 천 조각을 걸어둔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형형색색 헝겊을 말이다.

 


2003년 9월 7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