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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릿골 13 - 별 볼일


BY 박예천 2008-12-26

 

별 볼일  

 

 

 

여름이면 품앗이 밭일 나가시는 엄마보다 내 곁에 더 가까이 있던 큰 고모.

머리 빗기는 일이며 옷차림에까지 일일이 챙겨주며 학교 길 보내셨다.

큰 고모 시집가는 날. 장날 사주신 빨간 외투 잘 차려 입고, 서울특별시 영등포까지 와서 눈빛이 겉옷색깔처럼 붉게 되도록 울었다.


내일이면 결혼식장 사뿐히 걸어들어 갈 큰 고모가 자기이불을 살짝 들추며 같이 자자한다.

유난히 깔끔스럽던 고모는 절대로 이불을 함께 덮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혼자 윗방을 쓰며 함부로 들어오지도, 물건을 만지는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며 무서운 얼굴을 하곤 했다.

그러던 고모가 시집가기 전날 이불을 동굴처럼 만들며 들어오라고 한다. 고모냄새 맡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밤을 잤다. 시집간 고모이불은 큰 꽃무늬가 현란하게 그려진 얇은 솜이불이다. 그날 이후 고모와의 이별보다는 이불과 더불어 윗방까지 내 차지가 된 것에만 들떠 있었다. 사춘기 시작되던 나에게 그 방은 꿈이며 고모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줄 공간이 될 것만 같았다.


여름빛이 짙어지는 날은 한밤에도 그 열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할아버지가 마당가운데 짜 맞추어 놓은 평상 위에서 잠을 자볼 생각으로 꽃 이불을 들고 누웠다. 큰 고모냄새를 맡으려고 풀 먹인 이불끝자락을 코밑까지 잡아 당겨 덮었다. 풀벌레 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들으며 스르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새벽녘이었을까. 오싹 한기가 느껴져 잠이 깨고 말았다.

아! 그런데......눈 안으로 가득 들어올 듯 별 무더기가 보인다. 금방이라도 마구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손을 내밀면 곧 건져내질 듯 가까이 반짝거리는 별들 때문에 나는 다시 잠들 수 없었다. 고모의 꽃 이불 위로 나비 떼처럼 별들이 내려앉아 망사 홑이불을 만들고 있었다.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무리를 한참이나 쳐다보다 잠든 기억이 난다.


떠나는 엄마를 위해 징검다리 놓아주었다는 일곱 형제의 북두칠성자리도 새벽이면 혼자 빛나던 샛별이야기도 큰 고모가 해주었다. 계절이 바뀔 적마다 자리 옮겨가는 별자리를 찾으며 유년이 사춘기로 자라고 있었다. 별을 노래하듯 풋사랑에도 젖어들고 반짝이는 감성을 아름답게 가져볼 수 있었다.


별 볼일 있었으면 좋겠다.

아파트 쪽창에서라도 한조각 하늘 훔쳐내어 별을 노래하고 싶어진다. 힘겨운 인생살이 한탄하며 욕쟁이 내 할머니보다 더 거친 욕으로 세상 탓하는 큰 고모네 영등포구 신도림동 하늘에도 별들 내려앉기를 바래본다.

고모는 알기나 할까.

남기고 간 꽃 이불위로 가득 내려앉은 별무리를 고모처럼 느끼며 잠들었다는 것을. 이불이 다 낡아지기까지 별을 그리듯 고모를 그렸다는 말을 해줄걸 그랬다. 그랬다면 큰 고모 지금처럼 세상 밉다 안 했을 것을.

할 수만 있다면 별 한 소쿠리 가득 담아 큰 고모 집으로 택배 부쳐주고 싶다.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잃은 사랑을 읊어대는 지금은 별 하나 뜨지 않은 밤.



                                                   

2003년 7월 28일 별 없는 깊은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