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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짓는 여자


BY 박예천 2008-12-26

                  밥 짓는 여자

 

 

 

 

평소에 나는 남이 해주는 밥 얻어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었다.

밥 짓기 경력이 몇 년이나 되는지 손가락을 꼽아보니 어언 스무 해이다. 여고졸업반 입시를 위해 학교 앞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스스로 밥을 지어먹었다. 물론 밥 짓기를 처음 시도했던 것이 그때는 아니다. 아홉 살 적이던가. 품앗이로 바쁜 어머니가 여름 긴긴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에야 오시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쌀을 불리고 화덕에 불을 지폈다. 어린 나이에 뒤주에서 되 박으로 쌀을 퍼내는 것은 일이라기보다 흥미로운 소꿉놀이였다. 제법 고슬고슬하게 뜸을 들여 밥을 지어놓으면 어머니는 대견해 하셨다. 게다가 된장찌개라도 곁들여 끓여내는 날은 칭찬이 곱으로 전해진다. 어느덧 내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밥 짓기를 지겹다거나 힘들다 여겨본 적은 드물다. 어쩌다 혼자 끼니를 챙겨야 할 때 대충이나마 챙겨먹는 일이 좀 귀찮기는 하다. 몸살기운 으슬으슬 찾아오던 어느 날 설거지 하다가 문득 그릇을 내동댕이 쳐버리고 싶었다. 날마다 지겹게도 한자세로 싱크대 앞에 우뚝 서있는 나 자신이 싫었다. 단 하루만이라도 밥 짓는 일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이번 여름휴가를 맞이하여 아이들을 데리고 친척집 방문 길을 나섰다. 체험학습이라는 제목아래 여기저기 찾아다녔다. 핑계 김에 보고 싶었던 벗과의 만남도 가졌다. 아이들보다 내가 더 들떠 있었다. 시댁을 시작으로 친정에도 들리고 막내 남동생 집까지 골고루 며칠씩 묵으며 여행기분을 내봤다. 비록 혼자 떠난 나들이는 아니었어도 일상탈출을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허나 장소가 바뀌어도 내 밥짓 기는 계속되었다. 우선 시댁에 갔으니 시부모님 진지를 차려야 하는 맏며느리가 되어있었다. 일찍 일어나시는 어른들 습관에 맞추어 새벽밥을 지어야했다. 시동생내외까지 손님이 늘어 설거지 양도 만만치 않았다. 밥 짓는 여자는 내 오랜 이름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습관적으로 일어나 쌀부터 씻는다. 그것이 마땅히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누가 내게 입력을 해 놓은 것일까.


친정에 가면 다른 여자들은 긴장이 풀리고 우선 잠부터 쏟아진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정 반대이다. 차라리 시댁에서는 동서가 내 자리를 대신해주기도 하니 눈치껏 쉴 수가 있다. 친정에 오면 늙으신 어머니가 아직도 땀을 뻘뻘 흘리며 밥을 짓는다. 염색으로 겨우 가린 흰머리가 다시 귀밑에서부터 제 빛을 드러내는 어머니를 대하고 있노라면 측은지심이 생긴다. 어머니이기보다 같은 여자로 바라보는 것이다. 지지리도 복도 없는 여인네라고 어머니를 팔자타령 한가락으로 읊어대고 싶어진다. 며느리 밥 얻어 드실 연세에 아직도 시어머니 대소변 받아내고 밥을 지어 떠먹이신다. 어머니의 늙은 남편이신 아버지는 점점 아이가 되어 가는지 아직도 밥상 앞에서 반찬투정을 하신다. 찬의 종류와 간맞춤을 역정 내시는 아버지 호통에도 그저 미소로만 답하시며 또 다음 끼니를 준비하실 어머니 이름도 밥 짓는 여자.

어머니의 구슬땀이 내 가슴팍으로 뚝뚝 떨어지며 생채기를 내기에 오래 퍼지고 앉아있을 수가 없다. 딸이 와 있는 며칠 동안만이라도 허리 펴고 앉으시는 여유를 선물하고 싶었다. 별식을 해드린다며 수선을 떨었지만 어머니는 마냥 즐거우신 모양이다.

오랜만에 와서 일만 잔뜩 하다 가느냐고 맘 아파하셨지만 그거라도 도울 수 있어 기뻤다.


시댁과 친정 어느 곳에서나 밥 짓기는 나의 고정적인 자리이다. 물론 누가 강제로 시킨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상차림에 마음이 불안해져 꼭 내 식으로 고집하는 부분도 적잖이 있기는 하다. 음식의 재료를 준비하여 커다란 교자상에 격식에 맞춰 차려내고 먹는 이들의 행복한 입 모양을 보는 일은 나만의 즐거움이다. 맛있게 먹어줄 사람들이 떠오르고 말끔하게 비워진 접시가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한다. 한자리에 둘러앉아 먹으며 싸움질을 하거나 남을 험담하기보다 웃음꽃을 피우게 되니 차려진 음식은 가족 간을 사랑으로 엮는 촉매제이다. 요리를 기쁘게 하다 보니 새로운 양념하나가 더 추가되는 모양이다. 인사치레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차려준 밥상이 맛있다 한다.


작정했던 휴가의 끝 이박삼일은 안산에 사는 막내 동생 집엘 들렀다. 만삭인 올케도 애 낳기 전에 한번 만나야했지만 조카들이 보고 싶다는 외삼촌내외의 간절한 초대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삼복더위가 다 지나도록 여름 무더위는 지칠 줄 모르고 세상을 지글지글 볶아댄다. 방 한 칸용 에어컨이 숨이 턱에 차도록 찬바람을 품어대며 더위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남산만한 배를 내밀며 올케가 우리 일행을 냉방완비 된 방으로 몰아 부친다. 저녁때가 다 되어 들어섰으니 때맞추어 밥을 짓고 있었다. 뭐 도울게 없느냐고 방문을 열기만 하면 득달같이 달려와 편히 앉아있으라는 두 내외.

슬쩍 보니 벌써 얼굴로 목으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닭죽을 쑤고 있었다. 손위 형님이라고 몸보신 음식을 장만하는 모양인데 시원한 바람 쐬고 앉아있으려니 죽을 맛이다. 어디 남이 해주는 밥을 꼬박꼬박 받아 먹어봤어야지.


드디어 밥 짓기에서 해방되는 꿈이 이루어졌다. 밥상이 차려지고 둘러앉으니 내가 제일 연장자이다. 대접받는 위치에 앉으면 맘이 편하기만 할 줄 알았다. 형님 이거 드세요, 누나 많이 먹어라 하는데 어색하기도 하려니와 자꾸 속울음이 솟구치려한다. 누구 높은 사람자리 이박삼일 전세 내어 앉아있는 것만 같았다. 손 하나 까딱 안하고 얻어먹기만 한 게 여섯 끼가 넘는다. 이쯤 되면 소원성취 한 것이건만 내내 맘이 불편하다. 십 년 자취생활하며 밥 해 먹인 동생 녀석이 예쁜 색시 얻어 내 밥을 해준다. 곧 아이아버지까지 된다하니 감회가 새롭다.

이제 보니 얻어먹는 밥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구나. 남에게 꾸어줄 수 있고 베풀어 줄 것이 있음이 몇 갑절 더한 복이다. 며느리로 딸과 누이의 위치에서 밥을 지어 차려 줄 때가 맘 편하고 개운해지는 것을 보면 나도 팔자타령이나 읊어대며 여자의 운명을 부르짖어야 하나. 


세상 많이도 바뀌어 밥 짓는 일에 남녀 구분이 없다지만 그래도 부뚜막 앞에서 행주치마 곱게 여미던 어머니 모습이 정겹게 다가온다. 내가 어머니일수 있어 감사하고, 더불어 밥까지 지어 먹일 가족이 있어 좋다. 

동생 댁이 지어준 몇 끼 밥 얻어먹고 정신 번쩍 차리게 된 여름 휴가였다.

 

 

2005년 여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