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미안하다
여름방학 개학식을 마치고 집에 온 딸이 인쇄된 종이를 내민다. 2학기 급식당번 엄마들의 명단이었다. 종이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먹구름과 한숨이 섞여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당번 엄마들은 최소한 12시까지는 학교에 도착해야하는데 그 시간 나와 아들은 강릉언어치료실에 있을 때라서 곤란하게 되는 것이다. 1학기 때도 몇 번 못나갔는데 어찌해야할지 슬슬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엄마, 동생 때문에 못 가잖아 어떻게 할 건데?”
“넌 이런 거 걱정하지 말아라,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까.”
큰소리는 쳤지만 잠자리에 누워서도 뒤척이며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당장 다음달 1일부터 나가야 하는데 다른 엄마하고 바꾼다고 해도 대신 나가줄 형편이 되는 것도 아니니 참으로 난감했다.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기도 죄송하고 장문의 편지로 우리 집 사정을 말하자니 비굴해 지는 것만 같았다. 선뜻 결정을 하지 못한 채 사나흘이 지나버렸다.
어제 밤, 욕조에서 아들과 물놀이에 한참이던 딸아이가 갑자기 거실 쪽을 향해 소리친다.
“엄마, 나 깜빡했다. 선생님이 쪽지 적어준 거 필통에 붙여놨어. 전화 해 달랬어.” 가방을 뒤져보니 휴대전화 번호가 적혀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딸아이의 학교생활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일까. 선생님의 통화내용이 끝나가면서 나의 가슴으로 뜨거운 서글픔이 주르르 흘러 내려왔다.
내용인즉, 수업이 끝나고 유인물을 나누어주는데 그것을 받은 딸이 선생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선생님, 우리 엄마는 동생 언어치료 때문에 급식당번 못나오는데 어떻게 해요?”
이제 겨우 여덟 살인 딸은 마치 엄마가 미리 시켰던 말을 전달하기라도 하듯 자기 생각을 선생님 앞에 내보인 것이다. 딸의 말 때문이 아니더라도 선생님은 우리 사정을 알기에 조치를 취해놓으셨고, 통보전화를 하시려 던 참이었다고 한다. 자기 딴에는 엄마가 어찌할 바 몰라 절절매게 될 상황이 걱정되어서 한 말이지만 나는 나이답지 않은 조숙함을 보인 딸이 가여워서 내내 눈물이 나왔다.
동생들에게 양보만 당하며 늘 빼앗기는 딸로 컸던 내 어린 시절 생각나서 유독 딸에게는 맏이의 책임감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했다. 응석받이로만 크다가 동생의 문제와 만나면서 엄마의 전전긍긍함을 보게 되었고,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일찍 철이든 아이처럼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벼랑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 든다. 아이답게 크지 못하고 일찍 어른흉내를 내는 것만 같아서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씁쓸하게 웃을 뿐이다.
하교 길에 갑자기 비를 만나도 우산 들고 마중하는 엄마대신 친구엄마 편에 따라오는 아이. 유치원과 학교 봄 소풍에도 따라가지 못했던 엄마가 속으로는 많이 서운했을 텐데 불평한마디 하지 않는 딸을 대견하다 말할 수 없어 침묵으로 일관했었다.
동생의 상태를 이상하게 보는 친구들의 물음에 마땅한 답이 없었는지 “우리 동생 말은 못하지만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 아니? 속으로는 다 알고 있어.” 라며 기죽지 않고 말한다.
그러다가도 막상 엄마에게는 “엄마 언제가 되면 말하게 되는 거지? 동생이 왜 그런 거야?” 하며 묻기도 한다. “응, 마음이 아픈 병이 걸려서 그래. 가족들이 사랑해주면 나을 거야.” 엄마의 말을 들은 딸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을 한다. “어 알았다, 그럼 내가 치료약이겠구나?”
어린아이의 마음에서 어떻게 그런 고운 말이 나오는지 오히려 나는 자식에게 배우며 산다. 눈에 띄게 아들이 호전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언제쯤이면 말하게 되는 거냐고 물을 때도 있다. 차라리 몇 년 뒤쯤이라고 속 시원히 기약 있는 답을 주고 싶지만 안타까울 뿐이다.
이번 방학 내내 원주 시댁에 딸을 보냈다. 한 아이라도 수고를 덜게 해주시려는 어머님의 배려로 아이를 보내놓고 조금은 염려되었지만 성격만큼 잘 지내고 있었다. 개학을 하루 앞두고 딸과의 상봉이 있던 날. 키가 한 뼘이나 자란 듯 더욱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내가 본 것은 외형의 성숙이었고 어머님은 또 다른 말씀을 하신다.
어느 날, 티브이에서 취업정보 자막이 떠오르기에 어머님이 무심코 지켜보셨다고 한다. 평소 어머님은 몇 푼이라도 벌어야하지 않느냐고 예전에 하시던 간병인 일을 하시기를 원하셨다. 화장실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던 딸이 화면 앞에 계시는 할머니 곁으로 달려오더니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할머니 또 돈벌러 가려구 그래?”
“응, 돈 많이 벌어야지. 집에 있으면 뭐하냐?”
“할머니는 왜 그래? 엄마하고 아빠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다가 아프면 어떡해. 돈이 건강보다 중요해? ”
“그래. 돈이 좋지. 벌어야 쓰지 않니.”
“돈은 없어도 돼. 가족보다 더 소중한 게 어디 있어?”
어머님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는 할 말을 잃어 어안이 벙벙해졌다. 속이 꽉 찼다고 해야 하는지 너무 눈치를 보며 자라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린 손녀의 대견스러움을 친척들 모인 자리에서 대상이 바뀔 때마다 재방송하시며 자랑하신다. 빈말이라도 애 어미가 잘 키워서 훌륭하게 자랐다는 말씀 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나중까지 다 들었지만 말씀 끝에 주렁주렁 묻어 나오는 덤은 아빠 닮아 속 깊고 똑똑하다는 것이다. 덤벙거리고 침착하지 못한 것 등, 단점은 모두 엄마 같아서 그렇다는데 내 무엇이라 말하리. 우겨봤자 지가 누굴 닮았겠는가. 둘 다 반반씩 고루 이어받았을 것을.
오랜만에 중국집에 전화를 했다. 탕수육 한 개와 우짜면-우동과 자장면이 반 섞여 두 가지를 맛볼 수 있게 만든 음식이름-을 시켜 퇴근이 늦는 아빠를 제쳐놓고 게걸스럽게 먹었다. 저녁을 먹는 내내 딸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키득거리기도 하고 눈을 흘기기도 했다. 거의 모든 대화에 막힘이 없고 엄마의 말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딸이 든든해졌다. 어느새 이만큼이나 커버린 것일까.
딸 하나뿐이었던 나도 어릴 적 친정엄마와 별 얘기를 다하며 도란거렸다. 남자친구한테 온 편지를 스스럼없이 읽어드렸고 시시콜콜한 얘기까지도 졸졸 따라다니며 재잘거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 내 딸이 제 엄마 어릴 때처럼 나불거린다. 음식을 오물오물 씹는 딸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내가 한마디 했다.
“넌 딸이 아니다 이젠.” 놀란 표정으로 그럼 뭐냐 물으며 먹던 입놀림을 멈추고 큰 눈이 왕방울 되어 쳐다본다.
“그것도 몰라. 친구야 너하고 나는.”
어리기만 한 것이 언제커서 내 맘 알아 주려나 한숨짓던 일들이 추억의 사진첩 속으로 꼭꼭 숨어버렸다. 고개 푹 숙이고 앞만 향해 달려오느라 모르고 있었는데 그 사이 나는 친구하나 키우고 있었다. 그녀석이 제법 쓸만 해져 오늘 같은 날은 뿌듯함에 배시시 웃게도 만든다. 딸은 이렇게 많이 나를 챙겨주고 마음 읽어줄 정도로 자랐는데 위풍 당당 엄마노릇을 못해주어 그저 미안하다.
딸아! 그 동안 정말 미안했다. 이번 운동회 날은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져도 도시락 싸서 들고 갈게. 함께 손잡고 뛰지 못했던 소풍날들 한꺼번에 모아 가을운동장에 깔아놓고 힘껏 밟아보자. 그러면 엄마 조금만이라도 용서해 줄 거지?
2004년 6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