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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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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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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으라하네


BY 박예천 2008-12-26

 

                  덮으라하네

 


 

춘삼월에 때 아닌 서설(瑞雪)이 항구도시 속초를 덮는다.

겨우 기지개켜며 실눈을 떠보던 여린 새순들이 바짝 긴장하며 움츠러들겠다.

낭만이라 읊조리며 바라 볼 여유의 설경은 이제 내안에 없다. 쌓이는 눈이 곧 얼어 빙판이 되거나 녹아 흘러 질척해질 테니, 날마다 거리를 나서는 내게 골칫덩이가 될 뿐이다.


키 높이 다른 나와 아들은 우산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제 것을 주니 잘 받쳐 들지 못할 것이요, 예전처럼 포대기로 업기엔 버거운 덩치가 되어버렸다.

파라솔만한 지붕을 펼치고 흩날리는 눈보라를 피해 나와 아들이 숨어 걷는다. 다행히 택시는 잘 잡혀주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내내 일기가 고르지 못한 오늘상황을 오히려 흡족한 웃음으로 대하는 기사양반. 돈 벌기에는 안성맞춤인 날이라며 신호대기 틈틈이 지폐다발에 침을 발라넘긴다.

요금표시기에 택시비는 이천사백원이다. 예상 밖의 금액이 나온 것은 평소보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았던 탓일 게다. 천원지폐 두 장과 오백 원짜리 동전을 내밀며 선심 쓰듯 거스름돈을 거부했다. 백 원을 팁으로 여기자니 키득키득 속웃음이 나왔다.

궂은 날씨를 탓하는 여인네가 있는 반면, 오히려 그런 일기를 돈벌이 기회로 삼는 운전기사도 있으니 공평한 세상살이다. 제법 굵어진 눈발이 평지 자갈길 가리지 않고 골고루 도시를 덮는다.


아들을 치료실에 들이밀고 온통 하얗게 버무려진 세상으로 나왔다. 추적거리며 거리를 걷는다. 빠듯한 생활비나마 쪼개어 딸아이 위한 보험을 들기로 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기도 하거니와 십년 후 녀석의 학자금 마련에 목돈 들겠거니 해서 결정한 일이다. 며칠 동안 인터넷 자료를 뒤지고 생활설계사를 만났다. 우체국과 은행을 번갈아 드나들며 돈 많은 사람 흉내도 내보았다. 잘 따져보고 우리 실정에 맞는 것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침 남편과 상의 끝에 정해진 보험 상품이 있어 눈보라 속을 헤치고 걷는다.

은행 문 앞에서 큰 우산을 탈탈 털어대니 쏟아진 눈이 한 삽은 족히 되겠다. 지난겨울 참 질기게도 따라다니더니 결국 예까지 붙어왔구나.

이미 안면을 익힌 창구 여직원은 상담만으로 끝낼 줄 알았다며 손수 찾아온 나를 반갑게 맞는다. 가끔 기대하지 않았던 일에 맞닥뜨리면 기쁨은 몇 배 이자로 불어난다. 

청약서에 조목조목 적어야할 내용도 많다. 직업란에 주부라고 쓰는 게 아직도 낯설단 말인가. 내 것으로 삼은 지 꽤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유독 적응되지 않는 이름이다. 사무적인 대화만을 이어가기 미안했던지 여러 말을 묻는다. 주소지는 다른 동인데 이곳까지 오셨네요. 아들 때문에 주 4회 근처 선생님 댁에 방문한다는 대답을 하다가 들추고 싶지 않은 그놈의 장애아동 이야기가 또 나오기 시작한다. 


아들이 장애아라는 사실을 꺼내기 싫은 건 아니다. 장애를 인정하기 전까지 보였던 부끄러운 내 자화상 두루마리가 기억 속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겉모양 생김이 멀쩡하게 잘생긴 녀석. 사정모르는 사람들이 지나치며 한마디씩 거드는 것이 속으로 울화를 겹겹이 쌓이게 했고 끝내 대인기피증이 생기려는지 숨고 싶었다. 궁금해서 묻는 상황마다 설명하기가 귀찮았다. 목소리와 억양이 왜 그러느냐. 말을 못하는 것이냐.

최근 극장가에 올려진 영화 ‘말아톤’에서처럼 ‘우리아이에게는 장애가 있어요!’라고 주변인들 향해 소리치지도 못했다. 죄인의 얼굴빛으로 뒷걸음치거나 가리기에 바빴다. 돌이켜 생각하니 아들에게 그저 미안할 다름이다. 어미자격이라곤 도통 찾아볼 수 없는 성품을 지닌 여자가 팔자와 운명타령을 한숨 끝에 달고 다녔으니 하얗게 지우거나 덮어버리면 좋겠다.


메마르고 각박해져 습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푸석거리며 예민해져있었다. 가까이에서 생활하는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만 애꿎은 동네북이 되었다. 당시 내 얼굴가득 불만스럽게 써있던 말은, 니들이 내 맘을 알기나해?

슬슬 비위를 맞추거나 눈치를 보며 피하던 남편과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고생하는 것 알아주고 생색내기에만 급급했던 지난날들이었다.

짜증에도 급수가 있다면 특급수준은 의당 나의 차지였을 게다. 퇴근하는 남편을 다정히 맞아주기는커녕 기다렸다는 듯이 푸념부터 늘어놓았다.

가족을 벗어나 어쩌다 부딪히는 이웃에게조차 너그럽지 못했다. 꽈배기 몇 묶음을 삶아 먹었는지 매사에 뒤틀리고 꼬여서 부정적인 모습들만 읽어내기에 바빴다. 비뚤어져가는 맘 상태를 점검하기보다는, 그 탓이 모두 아들에게 있는 양 변명으로 일관했다.

아이의 장애로 인해 나는 모든 것을 잃었노라 체념하고 산 세월이었다.


입을 열지 않던 아들과 언어치료실을 다니며 씨름하던 어느 날. 어설프게나마 입술을 달싹이며 엄마를 부른다. 어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뽀얗게 웃던 녀석의 얼굴에서 나는 비로소 희망을 읽었다. 눈처럼 부서지는 아들의 웃음가루가 사방에 흩날리는 것을 보았다. 한 여름 폭염에도 온 대지를 덮으며 내리는 백색의 희열이 있음을 배웠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이를 통해 얻어진 것이 몇 갑절인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은행창구 앞에서 누가 볼세라 기억 속 두루마리를 서둘러 말아버렸다.


딸아이 보험증권을 받아들고 은행 문을 나서니 천지가 그날의 백색이다. 고물거리며 움직이는 것은 오가는 사람과 자동차행렬뿐이다.

나무마다 때 이른 조팝나무인지 흰 꽃을 달고 섰으니, 어느 것이 고목이고 어린나무인지 몸짓으론 분간하기 힘들다. 죽은 나무도 단 한번 꽃을 피우나니 춘설(春雪) 덕분이리라.

지나간 것들에, 흘러간 사연들에 연연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금세 농익을 봄 앞에서 아직 생채기만 들여다보고 있는 어리석은 이들을 향해 땅에 포개지며 소곤거리는 눈의 말들.

할 수만 있다면 그저 모든 것을 덮으라하네. 



2005년 3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