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래 순
다래순과 나와의 만남은 폭설내린 어느 해 겨울 강원도 한계령 중턱에 위치한 밥집에서였다. 내놓은 반찬들이 거의 나물일색이었다. 모두가 봄철에 뜯어 말려두었던 묵나물들이다. 정갈한 주인의 솜씨가 곁들여져 접시마다 색다른 맛이 전해졌다. 유난히 한 나물접시에만 젓가락이 닿는다. 주인에게 물어 알아낸 이름이 바로 다래 순이었다. 간만 겨우 맞추었을 정도로 무쳐진 양념은 단순해보였는데, 입안에 다래 순만이 지녔을 쌉싸래한 향이 오래 머물렀다. 나물전문가나 되어야 채취할 수 있는 귀한 것이겠거니 여겨졌다.
꼬물거리며 새순들이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던 봄의 중턱 어느 날.
드디어 나도 한계령밥집의 맛을 떠올리며 섣부른 나물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나물채취 길의 산들은 눈이 닿는 곳마다 절경이었다. 깎아지른 절벽을 끼고 돌아앉았거나 세로줄금을 그어대며 아래로 맑은 샘물을 흘리는 산에도 이름 모를 나물들이 숨어있다.
때맞춰 내려준 오월봄비로 산과들은 초록 아우성이다. 행여 뒤질세라 앞 다투어 잎들마다 제 빛을 나부낀다. 바람결에 까불거리는 새순들 틈에서 나는 반나절 내내 헤매고 있다. 행함 없이 마음만 앞서 챙겨온 비닐봉지가 몇 개인지 모른다.
주말을 맞아 선뜻 나물앞잡이로 나선 남편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지만 별 소득이 없다. 작은 풀들이 바람에 일렁거리기만 하여도 뱀이 지나가는 흔적이라며 호들갑을 떨어대니 나물조차 나를 외면하지 않겠는가.
다래 순을 찾아 눈을 번뜩이며 산을 후볐다. 키 높은 나무들의 향기로운 날숨만 몰래 훔쳐 마시며 걷는다. 모양과 빛깔이 거의 비슷하니 나물종류 구분 못하는 내 눈엔 여린 초록 잎이 죄다 다래 순으로만 보인다.
겨우내 물이 올라 통통해진 것은 봄 싹들만이 아니었다. 어찌나 체중이 불었는지 산 입구로 들어서기 전부터 숨이 턱에 찬다. 제 몸 하나 주체하지 못하면서 산나물을 뜯어보겠다고 나선 것이 애초에 과욕이었다. 냉장고 속 푸성귀들도 때맞춰 무쳐내지 못하는 게으른 여자인데 미리 겨울식량을 찾아 나선 꼴이니 풀벌레가 웃을 일이다.
게다가 나는 나물이름을 잘 기억해내지 못한다. 나고 자란 고향봄밭에서 캐 오던 냉이, 씀바귀가 유일하게 기억해내는 나물들의 전부이다.
십여 년 가까이 강원도사람으로 살았건만 아직도 나물의 이름 짓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머루와 함께 우리나라 산의 대표적 야생과실인 다래의 잎과 여린줄기를 나물로 먹는데, 이것이 바로 다래순나물이다. 강원도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산나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다래순나물을 한번 먹어본 사람들은 맛과 향이 독특하여 오래도록 잊지 않고 기억하게 된다.
다래나무는 덩굴이라서 다른 나무를 휘감거나 계곡물 흐르는 아래에까지 처지면서 자란다. 먼발치에서 언뜻 보면 각각 나뉘어 진 풀포기 같기도 하다.
길게 늘어진 덩굴 끝을 찾아 한손에 잡는다. 남은 손으로 좌우에 어긋 달린 순들을 톡톡 꺾는다. 마치 어린 시절 누에치기 도우며 뽕나무 끝을 휘어잡고 뽕잎을 훑어가던 일과 흡사하다. 물오른 순들의 끊어지는 소리 양이 늘어 가면 손가락 마디에 금세 풀물이 든다. 코끝을 스치는 초록 즙 냄새가 싫지만은 않다. 손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면장갑을 끼는 이들도 있지만, 먼저 손을 내밀고 성큼 다가서는 봄나물을 직접 맞잡고 싶어 나는 맨손이다.
봄 산 초입에 앞장서 달려와 애기 순들을 달랑거리며 반겨 맞아주는 다래나무가 아니던가.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제법 비닐봉지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슬슬 재미가 붙는다. 비지땀이 맺히고 목 뒷덜미가 후끈거리며 갈증이 느껴지건만 지루한줄 모르겠다. 비탈진 산 모서리에 간신히 매달려 섰는데도 두려움이 사라졌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여유가 생길정도로 한눈에 다래순잎을 알아볼 수 있어지자 자만심이 싹텄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산이나 들 앞에 서면 비로소 속 때 가득한 내 모습이 제대로 보인다.
분주히 움직이던 손동작을 잠시 멈추고 한참이나 멍한 상태로 숙연해진다. 또다시 자연 앞에서 쪼그라드는 내 자화상이 드러난다.
아집과 편견으로 이웃의 손길을 가지치기 해오던 지난 삶들이 다래 잎마다 붙어서 나부낀다.
펼쳐진 덩굴에 해충처럼 매달려 끙끙거리는 내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올라온 탓인지 어느새 한달음으로 내려가기엔 버거운 위치에 서있다. 앞만 보고 달음박질치는 그 버릇을 산에까지 달고 왔나보다. 덩굴사이에 낀 발을 빼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한발씩 옮겨보기로 했다. 순간, 발밑이 미끄러운가 싶더니 낭떠러지 위치에서 몸이 휘청거렸다.
살아남기 위한 본능이었을까. 손에 잡히는 아무거나를 잡아채었다. 얼마나 버둥거리며 몸부림을 쳐댔는지 다래덩굴 여러 가닥이 꺾이고 잘려나갔다. 몸의 중심을 잡고 다시 서니 등줄기에 서늘한 땀방울이 흐른다. 고사리를 찾아보겠다며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간 남편에게 그 모습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다.
제 새끼들의 여린 모가지를 허락 없이 꺾어대는 몹쓸 여자인데 기꺼이 팔로 휘감아 위기에서 건져주었다.
다가와 부여잡는 이웃들의 손길을 내기준의 잣대에서 판단하고 잘라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며 가르친다.
(오른쪽 맨 윗쪽에 있는 것이다래순 나물입니다^^)
해거름이 다되어 집에 돌아왔다. 펼쳐놓은 나물무더기가 욕심만큼이나 높은 산을 이루었다. 금방 데쳐낸 푸른 것을 양념고추장에 무쳐냈다. 또 다른 것은 참기름을 넣고 버무려본다. 어떤 양념을 첨가해도 제 향을 잃지 않는 다래순나물이다. 누구의 손길에 무쳐지든 자기만의 이름을 간직하여 지킨다.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환경 탓만 하며 엄살떨어대는 내게 자기 향을 오래 잃지 말라 한다.
삶아낸 나머지 많은 나물은 햇살 넉넉한 낮마다 널어말려 겨울식량으로 삼을 거다.
땅이 얼고 산마저 한기에 오스스 떨고 있을 찬 계절이 오면, 철지난 봄 향을 한줌씩 이웃에게 건네야지.
목숨 걸고 꺾어온 나물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2005년 5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