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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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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 늦둥이들


BY 박예천 2008-12-26

 

늦둥이들

 

 


 


(처음으로 피워 낸 풍란을 사진기에 담아보았다)

 

 

글의 제목만 친구들이 본다면

소식 없더니 다 늦게 애를 낳았느냐 물어올지도 모른다.

그것도 복수로 표현 한 걸보니 쌍둥이라도 되느냐 할 것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며칠 전 밤 아홉시 넘어 걸려온 시어머님의 전화.

“얘야, 어서 테레비 좀 봐라. 그거 보고 너도 더 늦기 전에 하나 더 낳아라”

말씀인즉, 인간극장 프로그램에 늦둥이 낳고 행복해하는 가정 보니 내 나이 충분하다는 것.

온전치 못한 아들 녀석 때문에 전전긍긍 애쓰는 아들며느리가 안쓰러워 건넨 말씀인줄 안다. 그래서 다행히 성한아기 낳게 되면 지금 내 아들을 어찌 바라보는가.

어른 말씀이니 군대답 없이 웃어드렸지만 오래도록 속내가 아려왔다.


지난 봄 우리 집에 들어온 풍란이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남편 돌보듯 애지중지 대해야 잘 자란다는데

웬걸, 오히려 남편보다 한수 위로 깍듯이 모시고 떠받든다.


세월을 거슬러 가보자.

뭐 그다지 오래 되짚을 것도 없는 것이 이곳으로 이사 오기 몇 달 전인 아파트생활.

내 손에서 살아남는 풀포기란 단 한 뿌리도 없었다.

단지 식물을 죽이기 위해서만 쓰이는 손인지 닿기만 하면 다 죽어갔다.

싱싱하던 물기도 내 손길만 스치면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되어 말라갔다.

화초 키우지 못하는 손인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어느 날.

갑자기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집안에 굴러다니는 화분을 싹 쓸어버렸다.

모래바람 가득한 사막에도 선인장은 살아있건만,

어찌 내 손길엔 녹색들이 견디지 못하고 모두 사라진단 말인가.


작년연말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집들이 때 화분 몇 개가 들어왔다.

선물이니 받았지만 시름시름 죽어갈 게 뻔해서 구석에 밀어놓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햇살 따사로운 봄날.

혼자 있으려니 갖가지 미세한 소음들이 귓전으로 밀려온다.

잡다한 소리들 틈에서 연두 빛으로 나를 사로잡는 움직임이 보였다.

화초의 키가 크는 소리가 아닌가.

사하라사막 주인 같은 나의 테두리 안에서 말이다.

눈을 의심했지만 분명 새순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화초연구가를 초빙해서 조사를 의뢰하지는 않았지만 결론이 내려졌다.

남편과 내가 공동 관찰로 내려진 사항은

그동안 나의 슬하에서 숱하게 죽어간 화초들의 주검들은 손 탓이 아니라는 것.

서향에 위치한 집구조가 이유였던 것이다.

애매하게 의심받아오고 좌절했던 지난날들이 억울했다.


불일 듯 의욕이 생겼다.

폐가를 기웃거리며 주워온 기왓장에 이끼와 어울리게 심고

시아버님이 꼬아주신 바구니에도 넝쿨 늘어뜨리며 걸어두기도 했다.

요즘은 하나씩 불어나는 늦둥이들을 끌어안고 매만지느라 날마다 들떠 산다.

화초들과 말하는 법도 익혔다.

잎사귀 앞에서 중얼대고 콧노래 들려주며 잘 자라주니 고맙고 기특하다 말한다.


오늘아침 본 우스운 광경하나.

주방에서 밥을 짓는데 욕인지 푸념인지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처음엔 전화통화 하는 줄 알았다.

궁금해 거실로 나와 보니

엊그제 작은 콩나물시루로 옮겨 심은 화초 앞에 남편이 쭈그려 앉았다.

곧 열릴 듯 꽃봉오리를 실하게 달고 있는 아이다.

“야! 바보야, 해삼, 말미잘, 멍게, 못난이 같으니.......”

유치해서 더는 못 듣겠다.

아니 어쩜 화초한테도 질투를 느낄까.

매일 화분에 물을 뿌리며 노래불러주고 칭찬하는걸 보더니 저런다.


개구쟁이 아이 셋(늙은 아들인 남편포함)을 키운 경험이 있는지라,

고분고분 잘 커주는 늦둥이들은 마냥 대견하기만 하다.

더구나 내 꺼칠한 손에서도 무병하며 꽃까지 피워주다니.

늦둥이들 품어대는 초록향기 재롱에,

나는 봄이 익어가는 줄도 모른다.

  


2005년 3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