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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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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높이


BY 박예천 2008-12-26

 

                       눈 높이

 

 


 

“산이 구름에 올라가요.”

“야! 이 녀석아 그게 아니잖아 구름이 산에 올라가는 거라고 말해야지.....철썩!”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나는 앞좌석 부자간의 대화를 지켜보며 몸 둘 바를 모르게 불안해진다.


아들이 강릉 언어치료실에서 속초로 올 때 한 방향이라는 이유로 횟집 운영하는 분의 차를 얻어 타고 온다.

그 아이는 올해 일곱 살이 되었고 언어발달이 지체되어서 같은 곳을 이용하는 중이다.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해야 되는 나이이고 보니 조급해진 아빠의 마음은 그렇게 다그침이나 성급함으로 나타난다.

말소리나 발음에 문제는 없는데 적절한 언어구사에 어려움이 있고 조사나 상황판단이 늦는 편이다. 

내가 몇 마디 말을 시켜도 늘 반말이나 엉뚱한 대답을 해서 아이아빠는 옆에서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본다.


승합차의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앉은 두 부자는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강릉과 속초간의 도로상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확인학습을 한다.

“저게 뭐라고 했지?”

“크레인이요”

“크레인이 뭐 하는 것인지 말해봐”

“올리는 거”

“따라 해봐. 물건을, 들어 올릴 때 쓰는 기계”

이렇게 그 아빠는 글자 한자도 틀리지 않게 앵무새처럼 따라하도록 지시한다.

만약 도치법을 쓰듯이 순서 바꾸어 말하거나 하면 가차 없이 넓적한 손바닥으로 아이의 머리를 소리 나도록 내리친다.


그 순간은 내 몸조차 소스라치게 놀라며 오그라든다.

내 아들까지 째려보며 때릴 것 같아 본능적으로 몸을 바싹 끌어안게 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오늘 언어치료실에서 이루어진 내용을 재차 아이에게 되묻는다.

“누가 물었어?” 목소리도 낮고 무섭다.

“사슴이 울었어요.”

“사슴이 누굴 물어?” 아까보다 더 격앙된 목소리가 차내에서 쩌렁쩌렁 울린다.

“사자하고 곰이 싸웠어요.”

“야! 사슴이 어떻게 물어? 응? 사자하고 곰이 물었지.”

나는 아이의 말뜻이 이해되었다.

사슴이 슬퍼서 울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데, 그 아빠는 자꾸 사슴을 물어버린 동물이 누구인 것에만 초점을 맞춰서 아이에게 묻는 것이다.

이미 답을 다 정해놓고 있는데, 아이가 자꾸 다른 대답을 하니 그때마다 손이 올라가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내 손이 그 남자의 뒤통수를 철썩대며 마구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시속 100키로 정도의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간판이나 이정표에 써 있는 지명을 묻기도 하고,

앞차나 옆에서 나란히 가고 있는 차의 번호 판 숫자를 소리 내어 읽으라고도 하며, 관광버스 몸통에 그려있는 큰 글씨들도 재빠르게 자신의 귀에 들리도록 요구한다.  

자기 아빠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 갈 적마다 아이의 소리는 떨려온다.


아이의 눈높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광고에서 보듯 어른이 아이 키에 맞추어 무릎을 꿇고 실제 눈과 눈을 마주 대하며 이야기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타내는 것은 비단 신체적인 높이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이의 생각에서 바라보자는 것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너무나 많이 들어 온 말이다.


딸아이가 다섯 살이 되면서 참으로 많은 호기심 어린 말들을 해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엄마가 되고 싶어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어느 날, 그림을 그리던 딸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이건 해님이야. 빛나는 거야. 아침에 사람들을 깨우려고 빛나는 거야.”

그때부터 딸아이의 대화 속에서 있어지는 아름다운 생각들을 아이의 말 그대로 기록을 해 두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선물로 주고 싶었다.

아이가 때로는 어이없는 질문을 하기도 한다.   

달이 왜 자꾸 날마다 커지냐고 묻는다.

나는 바로 대답해주지 않고 왜 그렇겠느냐고 아이에게 되물었다.

그러면, 참으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대답이 술술 나온다.

“응, 엄만 그것도 몰라? 밥을 잘 먹으니까 커지는 거야. 저녁 먹고 저렇게...”

남편은 옆에서 모녀의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는 흐뭇해하면서도 농으로 아이에게 비과학적인 설명을 해주는 엄마가 어디 있느냐고 웃는다.


무한하게 커져 가는 아이의 생각나무를 부모가 철사를 동이고해서 키 작은 인공의 분재를 만들어 버린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아이의 위치에서 들어주고 되묻고 마음껏 활개 칠 수 있도록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비가 개이면서 산 아래로 휘둘러 쳐진 구름의 무리를 보는 아이의 눈에는, 마치 산이 구름을 따라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고 사실적인 설명을 해주기보다는 그대로의 생각을 받아주며 산이 왜 구름을 따라 올라갔느냐고 되물었다면 아이는 시인처럼 근사한 대답을 내 놓았을지도 모른다.

가끔씩 이렇게 어른은 아이에게 어리석은 모습으로 다가서기도 한다.

생각에는 단답형 정답이 없다.

오히려 문어발처럼 마구 늘어진 대답들이 나와야 그 아이의 정서가 아름다움이며 상상과 자신감을 지닐 수 있다고 본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면서 마치 정해진 코스대로만 가야하는 운전면허 시험처럼 아이의 생각을 이끌고 있는지 깊이 고개 숙여볼 일이다.


한 단어씩 겨우 말을 시작하는 아들이 얼마 전부터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행복해, 행복해!” 하며 노래가사처럼 외우고 다닌다.

그렇다.

나는 내 아이들이 똑똑한 아이로 자라는 것보다는 조금 가난하고 부족하더라도 행복한 아이로 커주었으면 한다.

아이들 생각의 눈높이를 제대로 보는 엄마로 있어지는 것이 또한 나의 행복이 되리라.

늦은 밤. 두 녀석이 온 방을 뒹굴며 잠들어 있다.

아침이면 가장 행복한 기지개를 켜며 배시시 웃겠지.

    

   

 

  2003년 9월 8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