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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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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침소리


BY 박예천 2008-12-26

 

                  기침소리

 



할아버지는 기침을 많이 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사춘기시절까지 새벽이면 더욱 심해지는 기침 소리를 듣고 자랐다.

방과 방 사이 대청마루가 있건만 할아버지 기침소리는 아직 설익은 새벽을 두 동강 내듯 아프게 들려왔다. 잠이 깬 나는 이불 속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연실 들리던 그 소리가 갑자기 뚝 멈추기라도 하면 덜컥 겁이 났다.

가슴이 찢어지는 통증과 함께 묻어 나오는 기침이었건만 나에게는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는 유일한 소리로 들려왔다.

낮에도 가끔 할아버지는 숨이 넘어갈 듯 거센 기침으로 힘겨워 하셨다.

누웠다가도 목안을 넘어 나오는 숨 가쁨에 못 견디어 몸까지 반으로 접히며 들썩이신다. 젊었을 때부터 앓았던 오랜 지병이라 할머니께서는 좋다는 약을 여기저기서 구해 드리기도 했다.


읍내에 있는 여고에 입학을 하게 되면서 할아버지 기침약 심부름은 내차지가 되었다.

처방전 없이 약을 지을 수 있었던 시절.

단골 약국을 정해놓고 아침 등교 길 나를 불러 세운다.

“기침약 사와라 돈줄 테니.  새루날 삼천 원어치 달라구 해라.”

학교에서 끝나기 무섭게 시장 통에 있는 약국을 찾아간다.    

얼굴을 익힌 약사는 분홍색 알약인 ‘새로날’을 종이봉투 가득 담아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도록 꽤 오랜 기간 기침약 심부름을 했었다.

연세가 더해 갈수록 할아버지는 기침 가래와 호흡곤란까지 겹쳐 힘들어 하셨다.

가끔 전화를 하면 수화기너머로 말소리보다 헉헉하는 숨소리가 먼저 귓전에 와 닿는다.

오래되고 불편한 집을 개조해서 화장실을 집안에다 산뜻하게 꾸며 놓았지만 할아버지는 예전에 사용하던 뒷간을 이용하셨다.

볼일 보러 가끔 문 앞에서 인기척을 내면 예외 없이 밖으로 들리는 헛기침 소리.

“에헴!” 하는 소리로 할아버지인 것을 알고 깜짝 놀라 물러섰다.

한번은 막내 동생이 뒷간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안에서 미처 기침 준비를 못했던지 “나, 눠!” 하셨다는 얘기를 하며 지금도 웃곤 한다.

할아버지와 기침소리는 떼어낼 수 없는 신체의 일부 같았다.


추석이 가까우니 생전의 할아버지 모습이 더욱 간절해져 울컥 가슴이 미어져 온다.

기름 냄새 지글거리며 전을 부치고 송편도 맵시 있게 빚어내고 있노라면 밖이 궁금한지 방에서 나오며 “에헴” 하신다.

그 소리만 듣고도 엄마는“아버님, 전 부친 것 좀 드릴까요?” 하며 접시에 담아 드린다.

좋다, 싫다는 말씀도 없이 기침소리로 답하며 맛을 보셨다.

대문 앞에 놓인 평상에 한복 곱게 차려입고 앉았다가 손녀딸이 도착하면 제일먼저 맞이하는 할아버지.

말씀보다 헛기침 몇 번이 먼저 나를 반겼다.

말 못하는 내 아들은 그때도 지금처럼 할아버지 기침소리를 따라 해서 가족들을 웃게 했다.


돌아가시기 전,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말씀은 거의 못하고 기침이 더 심해졌다.

멀리 사는 핑계로 겨우 전화만을 드리는 손녀딸에게 거친 호흡소리 들려주셨고 알아들었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고 엄마가 전해주었다.   

마지막까지 기침소리로 당신 속내를 다 보이다 가신 할아버지가 오늘따라 더욱 그립다.

땀 흘려 일구던 밭이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 할아버지 고이 묻고 돌아온 집안엔 기침소리 조차 없어 허전함이 밀려왔다.

묘지의 둥근 모양이 살아 계셨을 때 늘 하시던 까슬까슬 할아버지 머리와 같아서 슬펐다.

힘겨운 기침하며 이른 새벽 숨차게 깨어 날 일없는 편안한 곳으로 가셨을까.



의복도 흰색만을 고집하여 입고 수양버들 아래 자주 가셨다.

진지 잡수시라고 가면 대답대신 헛기침하시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부재가 익숙해지기도 하련만 친정에만 가면 환청처럼 기침소리가 들린다.

금방이라도 경로당에서 들어오며 뒷짐 지고 “에헴! 너 왔냐?” 할 것만 같아 빈방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할아버지냄새 묻어 나오는 물건들은 아직도 집안 곳곳에 남아있다.

소죽 끓이던 사랑부엌 무쇠 솥, 여름이면 모시적삼에 땀 적시며 지고 다니던 꼴지게, 겨우내 만들던 삼태기와 바구니들에서 할아버지 기침소리가 풀풀 나올 것만 같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신던 하얀 고무신은 막내 동생 차지되고, 이번 명절에 가면 뭐라도 하나 집어와야겠다.

얼굴 찌푸리거나 언성한번 높인 적 없이 기침소리만으로 표현하다 가신 할아버지를 추억하며 만지는 물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2004년 9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