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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 남편표 택배


BY 박예천 2008-12-26

 

남편표 택배



출근길, 택배로 물건이 올 테니 잘 받아 놓으라는 당부의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남편.

엄청나게 중요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약속한 것도 취소하고 부랴부랴 시간에 맞추어 집으로 온다. 행여 밖에 볼일이 덜 마무리되어 늦기라도 하면 경비실에 따로 부탁을 해야 한다.

몇 년 세월 거슬러 올라가 기억을 더듬어보니 남편의 택배물건 받기 경력은 꽤 오래되었다.

물건들의 종류 또한 다양한 변화의 바람을 탔는데 그것은 남편의 취미생활과 더불어 한 물결을 타고 흘렀다.


아마도 처음엔 컴퓨터 관련 제품들이 상자에 포장되어 우리 집 현관문을 넘지 않았나 싶다.

컴퓨터의 구조이해나 활용방법이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자부하며 독학으로 이룩한 과업임을 늘 자랑으로 내세우곤 했다. 이름도 외우기 힘든 각종 부품들이 있는가 하면 성능 좋은 유명회사의 프린터라든지 스캐너 그 밖의 사진관련 부품까지 택배 상자 속에 실려 왔다. 인터넷 쇼핑몰을 찾아 헤매다 제품의 성능이라든지 가격 등을 고려하여 주문을 하는 것이다. 몇 개월 할부도 있고 일시불도 있다. 곁에서 지켜보며 단 한마디의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유일한 취미생활조차 막아버린다면 출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나그네가 될 테니 차라리 좋아하는 것 즐기게 하는 편이 낫다 생각했다.


한참을 컴퓨터에 관한 부스러기들이 배달되어 오더니 뒤를 이어 택배 속에 묻어온 것들은 책이었다. 서재에 있는 책도 고물상처럼 포개어 쌓아놓았건만 장르별로 몇 권씩 책 무더기가 날아온다. 그 상황에도 내심 너그러워졌던 것은 아무래도 책값이 컴퓨터관련 제품들보다는 덜 나올 것이라는 짐작에서였다.

이쯤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원래 우리 집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 담당은 남편이었다.

한참동안은 꽤 성실했으며 자원해서 정리하는 솔선수범의 자세를 보여 타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삼 학년 담임이 되었다는 그럴싸한 구실을 내걸어 후임자를 정해놓지도 않고 아예 방관자의 위치로 물러나 버렸다.

어느 날 무심코 쌓인 박스더미를 정리하다가 기절을 할 뻔했다.

세상에! 어쩌면 모든 상자 표지에 택배회사 이름만 인쇄되어 있는가. 그것도 모조리 남편이 주문한 물건들의 껍데기다. 차곡차곡 접어 묶는데 갑자가 부아가 치밀었다. 자기는 똥만 누고 내가 밑 닦아주는 기분이다.


요즈음 그 남자의 택배 주문항목은 무엇 인고하니 카메라 소품들이다.

무슨 렌즈니 삼각대니 해서 또다시 사진관을 차리기 시작했다.

낮에는 틈만 나면 새를 찍는다, 꽃을 박아온다 난리이고 밤만 되면 속초시 야경을 퍼 담아야 한다, 오징어배가 바다에 넘치도록 떴다더라 하면서 사진기를 들고 나간다.

아침출근길에 남편님께서 여전히 이르기를 택배가 올 것이니 오후에 꼼짝 마라 한다. 섬세한 렌즈이니 함부로 다루지 말고 살금살금 걸어 자기 방에 안착시키라는 거다.

택배이야기 하다 곁길로 빠진 느낌인데 결론을 말하자면 남편의 택배는 소비성이다. 피 같은 돈을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내 되는 이 몸의 택배내용은 어떠한가. 

단 한 푼의 경비를 지불하지도 않거니와 배달되어온 물건 값 또한 공짜이다.

친정에서 보내오는 귀한 먹을거리들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니 얼마나 야무진 살림장만인가.

또한 최근에는 각종 라디오 방송에서 나의 잡문들이 선택되어 소개되니 상품들만 해도 쏠쏠하다. 벌써 오늘 하루 동안에 각 방송사에서 세 차례나 상품을 보내왔다. 택배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가전제품과 가구에서부터 화장품세트까지 아내의 이름으로 오는 물건들은 실로 생산적이지 않은가.

그것도 나 혼자만의 취미생활을 위한 지출이 아닌, 가족모두의 행복한 생활과 식탁에 오르는 먹을거리이니 감히 남편의 택배와 견줄쏘냐.

거의 일방적인 견해에서만 남편과 나의 택배내용을 펼쳐놓은 것은 아니냐 하는 지탄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할 말은 해야 속이 편한 법.

도저히 이대로는 속이 뒤틀려 참을 수가 없다.


혹시 또 모르겠다.

어쩌다 가끔, 아내를 위해 싸구려 속옷이라도 주문해서 받아보게 했다면 내가 지금처럼 입에 게거품을 물지는 않았으리라.

남편만 위한 물건들만 속속 현관문을 넘어 들어오니 양처럼 온순(?)했던 나의 심사가 변하지 않겠는가.

저녁나절 상품을 받고 좋아하는 내 어깨너머에서 넌지시 하는 말.

“여보야! 방송국에서는 선물로 망원렌즈는 안 준 다냐? 그런 것 좀 보내 달라 해봐”

세상에....., 오징어 배 찍다 말고 들어와 뭔 오징어 먹물 터지는 소리를 하는가.


소비성 남편의 택배와 생산성이라고 외치는 아내의 택배가 맞물린 우리 집 물건들은 그런대로 자리를 찾아 제몫을 해내고 있다.

내가 소비성이라고 말하면 남편의 번지르르한 답은 또 있다.

“즐거운 취미생활로 육체와 정신이 건강해야 돈을 많이 벌어온단 말이야. 알겠어?”

돈! 돈! 그 좋은 돈을 많이 벌어다 준다는데 뭐 할 말이 있을까.

속물이라 말하든 말든 나도 어쩔 수 없는 아줌마이다.

당장 내일부터 택배 배달기록부에 남편이 출근도장을 찍더라도 눈감아줘야 하지 않은가.    

이렇게 남편표 택배는 그 끝이 묘연한 채 계속 될 것 같다. 




2004년 7월 9일 남편의 택배상자를 분리수거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