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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 친정표 택배


BY 박예천 2008-12-26

 


친정표 택배



먹을 김치가 있느냐고 물으시는 친정어머니께 떼쓰듯 응석부릴 수 없었다.

어머니의 수고로움을 만류하니 낙천적으로 다가오는 대답은 괜찮다, 힘들지 않어.

장마철이라서 채소 값도 만만치 않을 것이니 뒤란에 푸성귀 뽑아 버무리면 된다 하신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했던가.

임금님 진상미로 이름난 여주 쌀을 단지에서 떨어질세라 보내주시는 마당에 김치까지 넙죽 받아먹을 염치는 없었던 거다.

더구나 치매할머니 수발에 단 한나절 외출도 마음 놓고 못하시는 어머니께 짐을 더해드리고 싶지 않았다.


대를 이은 아들이거나 출세한 위치는 아니지만 나는 친정 쪽에서 꽤 대단한 인물이었다.

부모님은 물론이요 자리에 누워 계신 할머니까지도 내 이름 앞에 꼭 붙여주는 수식어가 ‘하나뿐인’이다.

하나뿐인 딸 양식거리도 못 대어주느냐로 시작하여 하나뿐인 손녀딸이라 안쓰럽다 마침표를 찍는다.

나불거리며 어른 말에 참견하기 좋아했던 내가 할머니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면 ‘내가 저를 왜 미워하나, 하나뿐인 손녀딸인데....’ 한숨 섞어 혼잣말 하셨다.

버르장머리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던 딸이 맏며느리로 시집을 갔으니 밤마다 걱정하며 잠을 설치셨을 테지.


아들자식들 장성하여 며느리까지 들인 마당에 어머니의 위치는 ‘시어머니’ 보다는 아직도 ‘며느리’이다.

전화 속 할머니 음성이 떨린다.

“느이 어멈이 나 때문에 고생 많다. 항상 미안하지.”

낳아 주신 어머니 밑에서 이십여 년 살고 시어머니 그늘에서 사십 년 넘은 세월을 엮으신 내 어머니.

가끔은 며느리인 당신의 이름을 내던지고 시어머니, 친정어머니이고 싶어 자식들을 챙기신다. 고된 일로 저리고 쑤신 팔다리 감추신 채 산달 가까운 며느리 아른거리고 멀리 바닷가에 사는 딸의 먹을거리가 궁금하다. 

어디 나만 하나뿐인가.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도 나에게 있어서는 한분뿐인걸.


택배로 쌀 한 가마 도착한 게 엊그제인데 또 현관문 앞이 그득하다.

이름하여 친정 표 택배 두 상자.

비닐로 싸매고 끈으로 동여매기를 여러 겹. 단단히도 포장하셨다.

김치 통을 꺼낸 후 또 하나의 상자를 여니 울컥 엄마의 젖 냄새 같은 것이 목안을 넘어온다.

눈과 코가 시큰거려 흐려진 시야를 훔치고 나니 흙에서 갓 태어났을 햇감자들이 올망졸망 여주 땅을 건너왔노라고 종알댄다.

쌀자루 속에 다른 물건도 슬쩍 함께 보내는 어머니 손길이 이번에도 실력발휘를 하셨다.

감자알들이 제 살결을 부대는 틈새마다 통마늘로 꼭꼭 채우고 옆 가장자리에는 대파 한 단이 누워있다.

자꾸 쏟아지는 눈물을 보는 이 아무도 없건만, 누가 물어보면 파 마늘 냄새에 아려서 그랬다고 답할 작정이었다.

나이 사십 넘을 때까지 하나뿐인 내 엄마를 파먹고 사는 하나뿐인 딸.

속상하면 딸한테 전화하라는 말에 너 살기 힘든데 걱정을 왜 시키느냐고.


애들 방학하면 달려갈게요.

속초 오징어와 젓갈 잔뜩 챙겨 ‘딸표 택배’로 부쳐드리면 어머니 한숨 반이 되려나.

눅눅한 장마 기운이 연일 계속된다.

뜨끈한 국물이 간절히 그리운 오후.

라면에 친정표 김치 곁들여 후루룩거리며 먹어야겠다.

아직도 어머니 속을 파먹는 나는 여전히 하나뿐인 딸이다.



2004년 여름 어머니 그리운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