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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릿골 11 - 마당이발관


BY 박예천 2008-12-26

마당이발관

 

 

 

 

왜 나는 동생들의 머리를 손수 깎아주겠다고 설쳐댔을까.

방금 있어졌던 일처럼 불안함에 덜덜 떨고 있는 두 남동생들의 표정이 떠오른다.

 

이른 초겨울이었다.

집에 마땅히 이발가위가 있던 시절이 아니라서 엄마가 사용하시는 바느질 가위를 손가락에 끼워들었다. 동생들을 마당에 나란히 불러 세웠다. 이발소놀이를 해본 가락이 있는지라 둘째 고모가 양장점에서 쓰던 동그란 의자를 갖다놓고 큰 동생 먼저 앉혔다. 나일론 보자기 목에 두른 후 목 뒤 매듭부분을 빨래집게로 고정시켰다. 가위를 들고 있는 나보다 의자에 앉은 동생 표정이 잔뜩 긴장하고 있다. 몇 번이나 도망치듯 싫다는 걸 반 강제로 끌어다 앉게 했으니 속으로 얼마나 누이가 미웠을까. 미장원에서 본 것처럼 분무기로 물을 뿌려댔다. 더운 여름날이라면 시원하기라도 할 텐데......., 동생은 어깨를 떨어댔다. 징징거리고 울기 시작하는 녀석을 감언이설로 안심시키며 가위질을 하기 시작했다.

방이나 마루에서 일을 시작했으면 동생이 한기에 떠는 일도 없겠는데 머리카락 흩어져 지저분해 질 까봐 외양간 앞에 자리를 폈다. 머리를 통째로 누이에게 맡기고 불안에 떨던 동생은 추위쯤 참을 수 있겠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실습대상이 된 것이 못마땅한 표정이다. 스타일이 엉망으로 나온다면 당장 내일아침 학교 길에서 놀림감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틈이 좁은 고운 빗으로 올려가며 가위질을 하다가 드디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나름대로 손에 땀이 나도록 조심하여 층층이 잘 다듬는다 싶었는데 귀를 돌려 깎는 부분에서 그만 모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귀의 모양과 자연스럽게 둥글리며 해야 되는 것을 기역자로 각이 지게 했다. 이미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다시 붙일 수도 없고, 동생이 알게 되었을 때의 후한이 두려워 끙끙거리는데 “누나, 거울 좀 갖다 줘. 좀 보게.”하는 것이다. 이일을 어찌하면 좋은가. 마지못해 동생 손에 커다란 사각거울이 들려지고 그 뒤로 들리는 것은 집안이 떠나가도록 울리는 울음소리였다.

 

일이 그쯤 되었으니 막내 동생은 슬슬 꼬리를 내리며 도망칠 궁리부터 한다. 형의 머리 모양을 직접 목격한 장본인으로서 감히 다가설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다. 큰 동생의 실수를 거울삼아 막내는 보란 듯이 예술작품을 탄생시키리라. 억지를 쓰다시피 해서 앉혀놓은 동생의 머리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겁 없는 누이는 장난감처럼 동생의 머리를 다듬으며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만족함을 선물하리라고 생각했다. 막내 동생의 두상은 큰 동생과는 달리 뒤통수가 납작해서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절벽인 곳을 입체감 있게 가위질을 해보려고 애를 써도 모양이 나오지 않고 자꾸 밋밋한 형태로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 대로 적당히 마무리를 하고 앞머리를 자르는 순간, 어찌하다보니 원망거리 하나 또 만들고 말았다. 눈썹 위를 기준으로 한일자가 되도록 반듯하게 잘라버렸으니 그 꼴이 보통 우스운 게 아니다. 거울을 보고 울먹울먹 하려는 동생을 겨우 달래 놓았다 싶었는데 밖에서 들어오던 삼촌이 동생을 보자 크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하하하, 머리 모양이 꼭 여자 같다.” 그 다음 상황은 물 보듯 뻔 한 것이 된다. 어리광 심했던 막내라서 형보다 몇 배나 큰소리로 울어버린다. 졸지에 두 동생 머리 꼴을 망가뜨려 놓는 괘씸한 누이가 되었다.

 

나의 머리 깎기 실습은 단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자 다시 길어진 두 동생을 향하여 날카로운 가위를 들이대기를 여러 번. 경험만큼 소중한 스승은 없다는 말은 꼭 맞는 말이다. 실력이 향상되어 자신감도 생기고 동생들도 스스럼없이 머리를 맡기게 된 것이다. 점점 자신이 생긴 나는 아버지를 졸라 가위가 맘에 들지 않으니 미용가위로 사달라고 했다. 손안에 알맞게 잡히는 작은 가위로 하니 마치 내가 영화주인공 ‘가위 손’이라도 된 양 신바람이 나게 즐거웠다. 중간에 한번쯤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온 동생이 오히려 누이 실력이 더 낫다며 앞으로는 우리 집 외양간 옆 ‘마당이발관’을 애용할 것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동생들 머리손질 해주는 내가 기특했는지 할머니는 아버지를 향해 세상에 거저는 없다 한다. “쟤도 머리 깎는 삯을 주면서 부려먹어야지 힘이 날거 아니냐. 이발소에서 치는 값에 반이라도 주거라.” 내가 마치 아르바이트하며 돈 벌 생각을 한 걸로 알았나보다.

할머니 말씀에 거역 못하는 효자 아버지는 정말 나에게 몇 푼 이발 비를 주셨다. 이제 돈 버는 재미까지 쏠쏠하게 맛본 터라 나의 가위질은 갈수록 기교를 더해갔다. 그 후 몇 해를 더 동생들 머리를 주물렀는지 가물가물 하지만 두어 시간 걸리던 이발시간이 아주 짧게 줄어든 것으로 기억된다.

무엇이든 눈으로 본 것은 꼭 해보고야 마는 나의 실험정신을 도와준 두 동생에게 지금이라도 고맙다는 마음 전하고 싶다.

 

 

 2004년 겨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