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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사온


BY 박예천 2008-12-25

 

                                                    삼한사온

 


한 며칠 겨울답게 추웠다.

설 명절 내내 두꺼운 솜이불이 시댁 거실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 밑으로 고부간이며, 형수인 나와 시동생들 발이 서로 엇갈리고 포개어있어도 맘이 너그러워진다. 기세당당하게 세상을 얼려놓은 동장군 덕분에 가져보는 편안함이다. 평소 같으면 어찌 시아버지 이불 속으로 며느리가 두 다리를 들이밀 수 있단 말인가. 갑자기 닥친 한파를 이유로 격식과 허물은 벗어 던지고, 온기를 끼워 입으려 웅크리고 모여드는 것이다. 이럴 땐 차라리 추위가 고맙다. 마음이야 어떻든 한 둥우리로 엮어지는 가족의 질긴 틀을 느끼게 된다. 체온이 닿고 마주한 사람들의 말소리가 가까우니 좋다. 


겨울철에 우리나라와 중국 동북부 등지에서, 사흘쯤 추위가 계속되다가 다음의 나흘정도 비교적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는 주기적인 현상을 삼한사온(三寒四瘟)이라 한다. 이것은 상층 대기의 영향을 받는 시베리아 고기압의 강하고 약함에 의해 나타나는 기후이다. 삼한사온은 법칙은 아니지만 겨울을 지내는 동안 유리한 여건을 마련해준다고 한다. 혹한을 견디어낼 힘이 생기는 것은, 곧 사온(四瘟)의 날들이 오기 때문이다. 일 년 사계절도 그러하여 긴 겨울이 지난 다음에 봄이 오지 않는가. 영영 싹틔울 새날이 없다면 냉기 속에 참고 견디는 것이 얼마나 큰 지루함이며 고통일까.


속초의 올 겨울 초입은 매섭지 않았다. 일월 중순이 넘도록 이른 봄 기온이라서 때 아닌 냉이 맛을 보게 되었다. 한 소쿠리 캐어다 국도 끓이고 무쳐 먹으며 행여 겨울이 그냥 건너뛰는 것은 아닌가했다. 장롱 안 겨울옷들이 나들이를 하고 싶은 표정으로 무겁게 접혀있기만 했다. 삼한사온(三寒四瘟)이라던 전형적인 우리나라 겨울 날씨가 이상 현상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의 자연이 어디 온전한 제 빛인가. 바다며 산과 공기까지 예측불허의 색이다. 사람들 심성도 그 기운을 닮는지 갈수록 괴이한 사건들이 속속 신문지상에 보도되기도 한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인지라 크고 작은 문제들로 기함을 하기도하고 미소를  짓기도 한다. 가족과 이웃 간의 질서가 무너져 헐뜯고 상처 주는 기사를 대할 때마다 온 몸에 소름이 끼쳐온다.

돈으로 인해 진정 고귀해야 할 것들이 가치를 잃고 버려지는 상황을 대할 때도 나 역시 그 속에 함께 들끓는 일원이 된 듯한 죄책감이 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가끔 곳곳에서 향기를 발하는 미담을 듣게 되면 ‘그래, 아직은....’이라는 안도감으로 숨을 고른다. 흔한 말로 ‘세상은 살만한 곳’ 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악하기만 하거나 어리석은 사람들로만 세상이 채워지지 않음이 참 다행이다. 고루고루 적당하게 삼한사온의 비율로 섞여있을 테니 조화로운 것이라 말하고 싶다.

남의 것을 갈취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마음 비워 베풀 줄 아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것 또한 세상을 보는 눈에 위로를 준다.

삼한(三寒)의 성질이 인간관계에 고드름 화살표가 되어 상대의 가슴을 헤집는다 해도, 사온(四瘟)의 사랑으로 데우고 녹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도 삼한사온의 반복이다. 이제는 끝이다싶게 고난으로 꽁꽁 얼어 막다른 길목에서 굳어지다가도 스르르 따스한 기운으로 녹아내리게 된다.

병들거나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당면하여 겪는 순간은 아찔하고 길이 없어 보인다. 마치 세상 드넓은 공간에 혼자만 버려진 것도 같고 수많은 사람들 얼굴이 낯설어 외면하고 싶어진다. 그러다 치료와 투병으로 병이 낫고 살림이 회복되어 형편이 나아지게 되면 힘겨웠던 날들이 과거 속으로 숨어든다. 이제 추억처럼 삼한(三寒)을 이야기하며 사온(四瘟)에 안겨 웃음 짓는다. 비단 이런 삶의 모습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리라. 인간이면 누구나 짊어지고 걸어야 할 공통된 분량이 아닌가 한다.

불행은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님을 살아가며 배운다. 삼한사온의 간단한 이치만 깨닫는다면 행복을 향한 기대의 깃발은 늘 가슴복판에서 펄럭여야 할 것이다.  


가정에서 가깝게 접하는 남편의 표정도 때에 따라 늘 기후가 다르다. 시베리아 혹한을 맞고 온 날은 잔뜩 구겨져 우박이라도 퍼부을 일그러짐이고 스트레스가 없는 날은 온난전선의 기운이다. 몸이라도 아픈 몇 날은 먹장구름 가득하여 소나기나 천둥번개가 있기도 한다. 삼한사온의 법칙은 부부사이에도 적용이 되어 서로 부딪히지 않으려 애쓰며 지낸다.

한쪽에서 비켜서 있다 보면 회복되어 맑음을 보이는 것이다. 한기를 지혜롭게 피해 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나면 언제쯤 따사로운 날이 올지 예견할 수 있게 된다. 


누그러진 듯했던 날씨가 바람을 끌어안고 저녁나절부터 다시 을씨년스럽다.

추위와 맞설 요량으로 잘 세탁하여 옷장 안에 모셔두었던 망토를 걸쳐 두른다. 잔뜩 어깨를 움츠리며 팔은 엇 걸쳐 양 겨드랑이 사이로 끼고 걷는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스스로 내 꼴을 보니 김장김치 얼지 않도록 거적 둘둘 말아 흙 속에 반쯤 제 몸을 묻고 서있는 항아리 모양새다.

간사스런 여자 같으니. 겨우 며칠간 있는 추위에도 이토록 갖은 엄살을 부려대면서 ‘어째 겨울이 이 모양이야’ 하며 하늘 향해 눈 흘겼던 얼마 전이 떠오른다. 작은 변화에도 진득하니 참아내지 못하고 양은냄비에서 물 끓어대듯 보글거리는 내 자신을 본다. 잠시 부는 칼바람에도 투덜거리고 며칠 포근한 것도 불만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어찌 되어먹은 심성이란 말인가.


이제 4한5온 이든 2한6온이 되든 너그럽게 싸안을 일이다.

음지가 있으면 양지도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는 평범하지만 진리였던 그 말들을 되새김질 해본다.

춥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며 내 인생무늬도 올록볼록 박혀가겠지.

잘 새겨놓은 골을 훗날 옹이 박힌 손길로 더듬어보리라.



2004년 1월 26일